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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딸기꽃

by 호호^.^아줌마 2009. 5. 8.

 

김현임 칼럼…딸기꽃


 딸기꽃이 하얗게 필 때면 내게는 그리운 이가 있다. 평생 당신 것이라고는 가져본 적 없고, 애써 키우던 강아지조차도 욕심내는 이에게 선뜻 주어버리는 성품이시니 그 분의 작은 몸피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부피를 지니셨던 내 외숙모님이다.

 

아들내외가 곤히 잠든 신새벽, 자식들이 일군 딸기하우스가 오달져 살그머니 잠자리를 빠져 나오셨으리라. 밤새 피워놓은 벌레 퇴치용 착화탄가스에 중독되어 딸기밭 고랑에 주무시듯 돌아가셨던 당신.

 

퀴리 일가의 죽음에는 코끝을 찡하고 아프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했다. 같은 길을 가는 안내자이며 스승인 동시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던 마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다. 축축하게 젖은 퐁네프의 길거리에서 두 마리의 말이 모는 마차 바퀴에 머리가 으깨어져, 인생의 가장 절정의 순간에 돌연히 가버린 이 젊은 과학자의 죽음은 과학사에서 가장 아까운 죽음이라했다.

 

남편의 안타까운 죽음뿐이랴. 방사선에 많이 노출된 딸 이렌느는 백혈병으로, 사위 프레드도 방사선의 폐해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극심한 절망을 딛고 마음과 영혼을 온통 방사선 연구에 쏟았다. 그녀 역시 방사선에 의해 타버린 손가락이 악화 되고 긴 세월 혹사당한 머리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게다가 신장에는 큰 담석에 악성 빈혈로 체온계를 들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다. ‘평화 속으로 물러나고 싶어’ 혼미한 정신의 그녀가 남긴 이 마지막 말은 주어진 자신의 생에 최선을 다한 이가 할 수 있는 에필로그의 대사였다.  

 

어느 죽음도 우리에게 손괴감을 주지 않는 죽음은 없다. 하지만 아득히 펼쳐진 미지의 인생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 번이라도 생의 손 놓음,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동반자살’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뉴스에 만감이 교차한다.

 

‘꿈은 아무 곳에도 없다’는 ‘Dream is no where’와 ‘꿈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Dream is now here’의 차이는 한 번의 띄어쓰기다. 그런가하면 탄생의 ‘Birth’와 죽음을 뜻하는 ‘Dead’와 사이에 C가 있는 것은 ‘Choice’, 즉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생의 길이 두 갈래로 달라지기 때문이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당당히 선언한 프랑소와즈 사강이다. 한데 내가 오롯이 내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은혜의 빚쟁이다. 어른들 이르셨다. ‘백정놈 피통을 지고 뛰더라도 산 것이 낫다’고. 어쨌든 우리에게 행복한 결말이 오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50%란다. 죽을 용기로 열심히 살자. 올해도 그늘을 용케 피한 딸기꽃이 햇살 아래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