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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학생독립운동 80주년 기념음악회 '기억의 의무'

by 호호^.^아줌마 2009. 10. 31.

그날...

80년 전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29년 10월 30일 그날의 기억을 찾아 나주역을 찾았다.

 

 

나주시 죽림동의 나주역.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다.

호남선 복선화 사업으로 역이 폐쇄돼 지금은 건물만 남아있다.

기차도 서지 않는 이 조그만 시골역에 채 온달이 되지 못한 달이 휘영청 떠올라 비추고 있다.

오늘의 의미를 아는 것일까. 

 

 

역사에 남아있는 열차시각표

무궁화호 새마을호 특정통일호

예전엔 시골역도 지나치지 않고 서는 비둘기호도 다녔는데...

 

 

개표하는 역무원이 뭐라했길래 그러나?

아이들이 따라 웃고 있네.

  

 

역에 남아있는 옛날의 흔적

해병대 창립 16주년을 기념한 영화란다.

예전엔 이런 포스터가 역 안에 붙어있었다.

  

 

서투나마 한국말을 곧잘하는 일본인 여인<왼쪽 사진>과

한 여성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사키 미치라는 이름의 이 일본인 여성은

일본 요코하마 YMCA에서 교류차 나주청소년수련관에 와 있는데

오늘 이날을 매우 의미있게 보고 있다고...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던 옛 나주역사(驛舍)에서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민족차별에 항거했던

조선의 청년학생들의 기개를 느껴볼 수 있는 뜻 깊은 자리다.

음악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광주YMCA 사무총장 남부원 씨가 인삿말을 하고 있다.

 

 

무지크바움(대표 조기홍)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관장 이운기)이 공동 주관한 이날 음악회는

‘기억의 의무-1929. 10. 30 그날의 함성-’이라는 주제로 학생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살리는 창작곡 등이 연주됐다.

 

랑(LANG)현악사중주단, 이 가운데 비올라 연주자 신정문 씨는 내 고등학교 시절

오페라 춘향을 보러갔다가 그의 연주에 반해서 광주시립교향악단 회원에 가입하게 했던 그 장본인이다.

오랜 세월 연주자로서 묵묵히 무대를 지키고 있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연주는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로 시작됐다.


이 음악, 영화 ‘플래툰’에서 한 병사가 두 손을 하늘로 벌리고

죽어가는 장면에서 흘러나온 곡이 바로 이 곡 아닌가?

이 장면에서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의 그 비감 어린 울림은

절절하게 관객들의 가슴을 후비기에 충분했다.

이 날의 울림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장중하고 비극적 선율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나주시립어린이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선주(영산포여중 1학년), 유소희(중앙초6), 조다빈(중앙초6)

김빛나(공산초6), 장혜원(영강초6) 어린이가

조두남의 선구자를 불렀다.

 

 

 

이어지는 나가현(나주중1) 양의 노래 ‘어느 구두닦이 소년의 노래’

 

문병란 시인의 시에 작곡가 김선철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한 구두닦이 소년의 죽음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학생들의 울분과도 맞닿는 노래였다.


저는 그냥 죽었어요

이유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죽었어요

어느 날 정오

태양이 빛나게 떠 있고

하늘과 땅 화안하게 아름다운 날

모란꽃도 장미꽃도 피어 있는 날

커다란 손과 발길들이

그 꽃들을 밟아 버렸어요

그 꽃들을 총살해 버렸어요

그 꽃들 곁에 누워 그 떨어진 꽃잎처럼

저는 그냥 죽었어요

이유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죽었어요

 

 

 

이 날 공연의 피날레는 작곡가 김선철(광주대 겸임교수)씨가

학생독립운동을 주제로 작곡한 ‘흑과 백’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학생들이 당했던 차별과 식민지 교육,

그 안에서 꾸준히 지속되어 온 학생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칠흑 같은 어둠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작곡가 김선철 씨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딸 은산이가 달을 찍었다.

"오늘 공연 어땠어?"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나중에 나온 노래는 톰과제리에서 톰이 제리를 잡으러 가는 것 같더라."

은산이의 얘기다.

맞다.

하이든 현악4중주 'Vogel' 4악장이 마친 그런 느낌이었고,

'흑과 백' 피날레 부분도

뭔가 쫓고 쫓기는 긴박감이 흐르는 선율이었다.

그 음악을 듣고 만화영화 배경음악을 연상했다니

우리 작은딸 음치는 아니네^^

 

 

학생독립운동의 이해를 돕기 위한 호호아짐의 Tip :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 ‘나주역’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봉기를 "광주학생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진원지는 나주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주역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시 신문의 기사와 재판기록 조선총독부의 기록 등에는 10월30일의 나주역 사건이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운동의 발단에 대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사"를 비롯해 1970년대 이후의 자료에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는 등 희롱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일단의 일인 중학생(광주중)복전, 말길 ,전중 등 수명이 같은 기차통학생이었던 광주여고 보생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 등 한국인 여학생을 차 중에서부터 희롱하고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그의 4촌 동생인 광주고보 2학년생 박준채가 격분하여 출찰구를 나오자마자 복전을 불러 세운 다음 "너는 명색이 중학생이 된 놈이 여학생을 희롱하는 것은 야비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일 학생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곳을 순찰하던 삼전순사가 박준채의 빰을 때리자 함께 있던 한인 학생들이 왜 한인 학생만 나무라느냐고 항의하였다.


이와 같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역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1월1일 광주역에서의 학생충돌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11월3일 폭발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학생운동의 중심에는 독서회 회원들이 주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전국154개교 54,000여명이 거국적으로 참여한 민족독립운동이었다.


학생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은 1930년대 사회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이끌어 갔으며 나주지역에서 참여한 학생들은 훗날 나주지역의 핵심적인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나주역에서 일어났던 한일 학생간의 충돌에서 앞장섰던 나주통학생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단에서부터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30여명이 퇴학 당하고 구속 기소되어 고초를 당한 이들이었다.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이 11월27일 봉기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독립정신은 1896년 단발령에 저항한 나주의거로부터 한말 의병운동의 뿌리깊은 전통 속에서 잉태되어 왔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일제에 의해 내륙 수탈 기지로 새롭게 영산포라는 신시가지를 조성하고 이러한 수탈의 현장을 어느 지역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느끼고 살았던 당시 나주지역의 정서는 1920년대 청년회, 신간회, 노동운동, 야학운동 등을 통해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주역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의 역할을 하였고 훗날 주도 했던 학생들은 나주지역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나주시에서는 역사의 기능이 상실된 나주역을 전라남도 기념물183호로 지정하여 보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을 민족운동의 터전으로 꾸미고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진원 기념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