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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시인

겨울 영모정에서 백호 임제의 시를 읊다

by 호호^.^아줌마 2010. 1. 18.

 

 

 勿哭辭(물곡사)


四夷八蠻 皆呼稱帝 사이팔만 개호칭제

唯獨朝鮮入主中國  유독조선입주중국

我生何爲 我死何爲 아생하위 아사하위

勿哭 물곡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죽음에 이르러 임종하는 자손들이 모두 우는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르기를,


사해(四海) 안의 모든 나라가

제(帝)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조선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방(陋邦)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곡(哭)하지 말라  

 

 

눈 그친 겨울 어느날,

홀연히 차를 몰고 그 곳에 도착했다.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영산강이 굽어보이는 작은 동산,

그 곳에 한 시대를 풍미한 백호(白虎) 임제 선생의 

시 놀이터 영모정이 있었다.

 

 

 

영모정 오르는 작은 언덕길에

사람 몇몇, 짐승 몇몇이 지나간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곳에 내 발자국 두 줄 남겼다.

 

 

백호 임제는 명종 4년(1549)에 태어나 선조 20년(1587), 39세의 짧은 나이로 운명하기까지

격치(格致)에 막힘이 없었고 탈속의 경지를 넘어 방외(方外)에서 놀다간

참으로 보기 드문 반지성의 아웃사이더였다.


해학과 풍자로 일관된 인물로 28세에 과거에 올라 예조정랑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꿰뚫기는 어렵지만 동서 붕당의 정치색에 물들지 않고

사해를 관통하며 자주정신을 실천한 역사상 유일한 단독자라 할 것이다.

그는 호남 3쾌걸 중 같은 나주 출신인 임형수(林亨秀)와 더불어 반지성파의 레지스탕스에 해당한다.

 

임형수(1504~1547)가 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으로 아들 구를 불러놓고

 ‘글을 배우되 과거는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던 것처럼 그 또한 운명하면서

‘사해 모든 나라가 제각기 황제라고 칭하는 마당에 유독 우리만이 자주독립을 못하고 사대에 얽매여 있으니

내가 살아 무엇을 할 것이며 죽는다 한들 무엇이 서러우랴, 내가 죽더라도 곡은 하지 말라’고 했다지 않은가.  

 

 

 국진굴


 

 

                                                   너의 할아버지는 금나라  궁궐에서 나와

황옥을 타고 담소하며 살았는데,

못난이 손자는 황옥을 버리고

도망하여 암혈에 와 숨었구나

원나라 병사가 깊이 들어와

굴을 파괴 하려고 하니

슬프다 슬프다 숨을수가 없어서

몸은 포로가 되고 나라마져 망하여

궁궐에는 돌아가지 못하고

원혼이 두견새에 의탁하니

피를 토하고 울어 진달래 꽃에 물이 들고

공산에는 천고에 달만 떠있네

 

 

길에서 비를 맞나


산오름 차림을 군복으로 갈아 입고

구름속을 계속 걸어 들어가는데

은하수를 기울인듯 비가 쏟아지니

많은 봉우리가 씻겨 연 꽃봉오리 되고

말굽아래 흙먼지도 말끔한데

호대가엔 샘물소리 들려오네

가까운 곳에 선방이 있는지

들밭에 송화가루 가득 날리네

 

 

아, 그런데 어찌된 인심인지

영모정 뜰은 드나든 이 하나 없었던 듯

나무 그림자만이 고즈넉한 오후

긴 공허함을 그려내고 있다.

 

 

이 빈 공간을 사뿐히 밟아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는 나.

나는 비로소 그와 둘만의 對話를 청하게 된다.

 

 

 

 

그는 현실에 거처를 두고 안주하기보다는 풍류남아로서 떠돌기를 좋아했으며,

닿아 머무르는 곳에 풍류와 운치가 있기를 바랐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우선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아래로 동화 땅을 내려다보니

아득히 다만 누런 먼지 뿐

下視東華土

茫然但黃埃

 

 

 

 

임제는 28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지제교(知製敎) 재임 중에 당쟁을 개탄하고

치사(致仕)한 후 승경(勝景)을 찾아다니며 일생을 마쳤다는 전기적 사실로 미루어보아,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장부의 시선에는 진세의 세상사가 황사 먼지에 묻힌 것처럼

아득하고 답답하게 보였을 것이다.


임제의 다음 시조에서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서는 남성의 호방한 기개가 잘 나타나 있다.


北天이  맑다커늘 우장 업시 길을 나니

산의난눈이오고 들에난 챤비온다

오날은 챤비 마자시니 얼어잘가 하노라


그는 외공간의 길에서 눈과 찬비를 맞으며, 내밀한 거주지를 그리게 된다.

외공간의 고독과 추위가 가중될수록 집의 보호성은 증가한다.

특히 “찬비”(寒雨), “얼어가”(男女交合) 등의 중의법을 써서 내밀한 성적 공간을 지향한다.

 

 

 

이에 화답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우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일 얼어 잘이

鴛鴦枕 翡翠衾을 어듸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노라


임제시에 나타난 길 위의 나그네로서의 여정과 풍류적 활동은 그가 남성적 젠더 공간을 소유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황매천(黃梅泉)은 백호의 고향인 회진을 지나면서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九泉莫抱英雄恨

  今日朝廷帝座高


  저승에 계신 영웅이여, 한을 풀으소서.

  오늘은 독립국가로 황제가 높이 계십니다.


 

 

바로 이 시구가 지금 계획 중인 백호의 기념관 앞에 새겨질 시다.

백호의 패강가십수(浿江歌十首) 중 둘째 수를 읊어보자.


  東明異說屬漁樵 麟馬朝天事寂寥

  野草欲纏文武井 沙禽飛上白雲橋


  동명왕 전설은 어부와 초동들에게서 아직도 전해오는데

  인마가 날았던 그 시절의 하늘은 오늘따라 더없이 적막하기만하네.

  들풀은 엉켜서 문무정을 덮으려 하고

  물새는 날아 백운교 위에 치솟네.

 

 

 

임제의 기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선이 굵고 색깔이 분명했으니 그는 타고난 풍류가객이었다.


호탕하고 기발한 그의 시는 항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의 대문호 신흠은「백호문집」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가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컫었고

또 시에 있어서는 그에게 90리나 훨씬 뒤떨어져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 변에 통개 베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왜라 소리에 잠 못 들어 하노라


 

 

그의 사상은 호방하면서도 명쾌하고 드높은 기상을 지녔다.

나라의 자주성 회복과 강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세계를 호령하고 싶은 심정이 담긴

그의 시가 묘 아래 시비에 적혀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임제의 우화소설들은 봉건적 지배체제의 억압적 본질과 사대부적 이상의 좌절과

성리학적 이념의 회의 속에 맞이하는 작가의 내적 갈등과 불안, 우수와 고뇌를 상징적으로 형상하고 있다.

 

 

후대의 연암 소설이 우의적 구도·표현과 함께 신랄한 어희와 패러디를 통해 작가의 예리한 비판정신을 구현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임제의 우언소설 작품들은 조선 전기와 후기 소설사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와 소설이 지니는 중요한 문학사적 가치는 이처럼 당대 문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보적 개성 내지 독창성에 있는 것이다.


양반사대부의 허울을 벗어 던지는 파격적인 행적과 호방한 기품을 보였던 임제였지만 요즈음은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가끔씩 고요함을 깰 뿐이어서 아쉬움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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