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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이야기

나주읍성 4대문 중 마지막 ‘북망문’ 상량식

by 호호^.^아줌마 2018. 6. 13.

◇ 나주읍성 복원의 마지막 관문인 북망문 복원을 위한 상량식이 5월 16일 현장에서 열렸다.



나주읍성 4대문 중 마지막 ‘북망문’ 상량식 

남고문→동점문→서성문 이어 올해 10월 준공 예정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37호인 나주읍성 4대문 복원사업의 마지막 관문인 북망문 복원 상량식이 지난 16일 나주시 대호동 북망문 복원현장에서 열렸다.


상량식(上樑式)은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으로, 공사 기간 무사고를 기원하고 거주자들의 바람과 희망을 적어 고사를 지내는 전통풍습이다. 

 

상량식은 초헌관에 조재윤 나주시장 권한대행이, 아헌관과 종헌관은 김판근 나주시의장과 김종훈 진강건설 이사가 각각 맡아 식을 봉행했다.


조재윤 시장권한대행은 “나주읍성 마지막 성문인 북망문 복원을 통해 역사문화의 중심도시로서 우리 나주시가 전라도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읍성 4대문을 도심 속 유휴공간으로 적극 활용해 관광객 유치 및 원도심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나주시는 지난 1993년 남고문을 시작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37호인 나주읍성 4대문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남고문에 이어, 2005년 10월 동점문, 2011년 10월 서성문 복원을 완료한 나주시는 복원사업 25년째이자, 전라도 정명 천 년인 올해 10월 준공을 목표로 북망문 복원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총 사업비 84억 원이 투입된 북망문 복원사업은 지난 2012년 토지매입을 시작으로 2014년 1차 발굴조사를 실시, 육축, 옹성 등의 자료를 확보하고 2015년 1월께 착공했다.


특히 복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2016년 1월부터 시작된 북망문 성문 형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총 16번의 회의를 거치는 등 공사가 18개월 동안 중지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920년 발간된 <속수나주지>를 통해 ‘홍예식’ 성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2017년 7월 문화재 사적분과위원회를 통해 이를 최종 결정했다.


북망문은 성벽 총길이 107m, 옹성 42m, 문루 45㎡로 복원되며, 대문 일원 잔디광장과 주차장을 조성해 관광객, 주민들의 편의를 제공할 방침이다.


나주읍성의 역사적 기록은 1237년 고려사 ‘김경손 전’에 확인된 이후, 삼봉 정도전의 <등나주동루유부로서>,<제나주동루>글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읍성은 조선시대 나주로 부임한 김계희 목사(1457.8.~1459.11 재임)가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제강점기 때 성벽을 헐어 길을 놓고 주민들로 하여금 집을 짓는 허드렛돌로 쓰이게 되면서 원형을 잃게 되었다.


















나주읍성은?

나주읍성(羅州邑城) 또는 나주 읍성 남문지(羅州邑城南門址)는 사적 제337호로, 나주시 성북동·교동 일대에 있다.

고려시대에 쌓은 성으로 조선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다.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둘레는 3,126척(약 940m), 높이는 9척(약 2.7m)이며 대포를 쏠 수 있는 성벽에 나온 포루가 3개이고, 우물이 20여 개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4개로 동·서·남·북에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북문터에 기초석만 남아있다.


1993년 남문터에 복원한 남고문이 있는데, 2층으로 된 누(樓)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나주읍성의 옛 모습 일부분을 보여준다. 남문터의 석축은 비록 적게 남아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보존해야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나주읍성은 보성읍성과 함께 읍성축조론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404년 (태종 4년) 긴급 수축(修築)되었다. 이는 동년 7월에 왜선 33척이 전라도로 침입해 오자 수군지휘관인 김영렬(金英烈)을 보내 격퇴한 뒤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불과 3개월 만인 동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따라서 이 때의 나주읍성 수축은 계획적인 읍성축조였다기보다는 기왕의 토축(土築) 부분을 석축화하는 정도에 만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후에도 나주읍성에 대한 본격적인 수축 논의는 계속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세 차례에 걸쳐 증·개축이 이루어진 나주읍성은 한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오다가 1910~1920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4대문(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과 성벽에 대한 훼철작업이 빠른 속도로 행해졌고, 그 읍성터는 식민통치 건물지, 일반대지, 혹은 도로망 등으로 전용되었다. 해방 이후 나주의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훼손이 더욱 격심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