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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소띠해 소에게 배울 한두 가지

by 호호^.^아줌마 2009. 1. 12.

소띠해 소에게 배울 한두 가지


 

  오종근 교수 (동신대 소방행정학과)


 소는 우리민족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순한 가축을 뛰어 넘어 한 식구처럼 생각되어 왔다. 이는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다는데 알 수 있듯이 생구는 식구이며 가족이다. 소를 생구라고 한 것은 가족처럼 그만큼 소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우리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노동력일 뿐만 아니라 운송기능도 담당했다. 또한 재산의 일부였다.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목돈을 마련할  비상금고 노릇을 했다. 70년대 우골탑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이 소를 가족처럼 여겼기에 관심 또한 각별했다. 날씨가 추우면 짚으로 짠 덕석을 소등에 덮어주고, 봄이 오면 외양간을 먼저 치웠으며, 겨울이 올 때까지 청소해 주었고, 이슬 묻은 풀은 먹이지 않고 늘 솔로 빗겨 신지대사를 도왔고, 먼 길 갈 때에는 짚으로 짠 신을 신겨 발굽 닿는 것을 막았다.

소는 또한 부와 재산, 힘의 상징이다. 신화의 소는 고대에 이미 목축이 존재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제주도의 삼성혈신화는 소, 말의 목축 기원을 말하고 있다. 태초에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 세 신인이 태어났고 바다에 떠서 온 돌 상자에 세 처녀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의 종자가 있었다.

이들이 결혼하여 비로소 오곡을 심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날로 부유해지고 번창하였다. 아울러 수로부인(水路夫人)에게 헌화가와 함께 꽃을 꺾어 바친 노인도 암소를 끌고 있었으며, 세경 본풀이에서 축산신으로 좌정하는 정수남도 우마(牛馬)를 길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소를 농사신으로 인식하여 새해에는 풍년을 기원하며, 가을에는 고된 농사일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의미로 소를 위한  각종 풍속과 민속놀이가 행해졌다. 이는 이미 농경의 바탕으로서의 인식과 함께 부유와 번창이라는 데서 소에 대한 재산의 관념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하였다. ‘십우도(十牛圖)’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시한 것이다. 이는 소를 찾고 얻는 순서와 이미 얻은 뒤에 주의할 점과 회향할 것을 이르고 있다. 고려시대 조계종 수선사의 개조인 보조국사 지눌의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다. 소를 기르는 이, 즉 참마음을 장양(長養)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해 한용운도 만년에 성북동 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하고, 스스로의 진면목을 찾기에 전념하였다. 도교에서는 무위자연을 표방하는 만큼 유유히 살기를 원한다. 옛 사람들이 소를 타고 유유자적하는 이들이 있었다.

김홍도의 ‘목우도(牧牛圖)’와 ‘군선도(群仙圖)’, ‘나들이’ 등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맹사성이 소를 타고 고향인 온양을 오르내린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소걸음은 느려도 천리를 간다고 했다. 풍수설에 “묏자리가 소의 형국이면 그 자손이 부자가 된다.”고 하였고, “꿈에 황소가 집에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 등을 보면 소가 풍요와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 띠 해에는 어진 소처럼 고구려 ‘쌍영총’벽화에 보이듯 왕이 타는 최고급 승용동물이었던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평화롭게,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여유로움을 지닌 우리 민족의 기질과 잘 융합되어 어려운 올 한 해도 부지런한 소의 힘으로 힘찬 발걸음을 걸어가도록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