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진정한 바텐더(bartender)
박용선(나주시 금천면 원곡리)
세상 모든 사람들은 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모두가 최소한의 물을 사용하고 있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꿀 역시 불필요하다고 하는 이가 없다. 꿀이 없어서 죽은 사람도 없다. 성질이 비슷한 다른 물질로 대체가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인지 혹자는 꿀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나름대로 물과 꿀은 다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서두로 이러한 말을 꺼내는 이유는 나주의 현실이 극과 극으로 대립되어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다. 시민들의 입맛에 맞는 꿀물이 족한 것이다. 그런데 중도적 시민의 외침을 망각하고 물의 관점에서 혹은 꿀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자칭 나주의 주인이라는 그들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물과 꿀은 섞이는 성질이 있다. 물에다 꿀을 섞어도 꿀물이요, 꿀에다 물을 섞어도 꿀물이다. 물과 꿀을 섞어놓고 ‘물꿀’이라고 말하는 이는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허물에 관홍뇌락(寬弘磊落)하고 당연시 하면서도 상대의 허물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생체기를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몰염치한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행태는 누구에게도 이익이 될 수 없다. 상대를 동반자적 파트너로 인정할 때 상호 윈윈(win win)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깊어진다. 중도적 시민은 그들이 보편적 가치를 모르는 것에 대해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민은 물과 꿀을 섞은 것을 꿀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독특한 아집으로 ‘물꿀’이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물과 꿀이 섞인 것이 중요하지 물이 앞이든 꿀이 앞이든 중요하지 않다. 소모적 논쟁을 하다보면 모두를 잃을 수 있는 끔찍한 나주가 터널로 다가올 수 있다.
극과 극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중도적 시민의 의사는 외면되고 무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나주를 양분시키는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여기서 끝내야 한다. 중도적 시민의 침묵하는 일갈(一喝)을 그들 모두가 느꼈으면 한다.
성질은 달라도 물과 꿀은 섞일 수 있다. 꿀물을 만들어 내는 진정한 바텐더(bartender)가 오늘 우리 나주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기성세대의 판단 오류가 후손들에게 짐이 되어선 안 된다. 오늘 나주 사회에 일성(一省)을 요구하며 소회(所懷)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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