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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도대체 자네라는 말이 어쨌다고들 그러시는지...

by 호호^.^아줌마 2010. 3. 15.

"남편한테 자네라니? 자기라고 하든지..."

 

또 타박을 들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인데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자기라는 말은 도저히 안 나오고 그러면 결혼 전처럼 차라리 '조OO 씨'라고 부르던지, '조 기자'라고 하든지, 이 것도 저 것도 아닌 '은강이 아빠'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애가 한 명일 때는 그냥 '은강이 아빠'란 말로 통용이 됐는데, 둘째 은산이를 낳고 말귀를 알아 먹을 때가 되니까 "왜 언니 아빠라고만 그래? 내 아빤 아냐?"라고 따지고 든다. "그래 알았다. 강산이 아빠라고 하자."며 얼머부렸지만 이 무슨 비효율적인 말소비인가? 이런 저런 골치 아픈 사정을 그냥 '자네'라고 하면 될 것을 왜들 이렇게 복잡하게 구는지.

 

그런데 자네라는 말을 썼다가 된통 당한 사람들이 나 뿐만은 아닌 듯 싶다.

 

광주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 있는 회사에 다니던 김 아무개(41)씨는 몇 년 전 회사 선배한테 ‘자네’라고 했다가 크게 혼났다.

 

 “자네가 이 업무 좀 처리해 주소.” “뭐, 자네?”


전남·광주 사람들이 서울에 가서 손윗사람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려고 ‘자네’라고 말했다가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말하는 쪽은 친근함의 표현인데, 듣는 쪽은 시건방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네’는 광주·전남 일대에서 손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독특한 토박이 말이다. 부부 사이에서도 많이 쓰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도 쓴다.


보통 광주·전남 이외의 지역에선 장인·장모가 사위를, 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예사낮춤으로 부를 때 자네를 사용한다. 40대 이상의 동년배들이 상대방을 부를 때도 자연스럽게 자네를 사용한다. 반면, 전남에선 ‘형(오빠)이나 누나(언니), 고모, 이모, 삼촌’ 등에게 ‘허소체’와 함께 자네를 사용하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렇게 몰이해와 괄시 속에 광주·전남 일대에서 독특하게 쓰이는 이 토박이말 ‘자네’가 사라지고 있다.


조선대 강희숙 교수(국문학)가 전라도 사람 100명을 면담 조사한 결과 ‘하위자→상위자’ 관계에선 40대 이상에서만 이 말을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 교수는 이를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생각이 서울 중심(표준어)이어서 토박이말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강 교수는 문화의 다양성만큼 말의 다양성도 중요하다며 토박이말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자네’라는 말은 조선시대에는 영호남에서 두루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 임씨 가문의 문헌자료를 보면, 17세기 말 임영이라는 사람이 막내누나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자네’라는 표현을 썼다. 또 16세기 말~17세기 말 경상도 안동의 한 여인은 31살에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을 향한 애틋한 심정을 담아 묘지에 묻은 편지글에 '자네(남편)'라는 말을 14회나 사용했다.


자네라는 말에 담긴 뉘앙스는 무얼까? 친근하고 편안함이다.


'품바'의 연출가이자 시인인 故 김시라의 시 '오 자네 왔능가(1966)'를 한번 읽어보자.

 

 오- 

자네 왔능가!

이 무정헌 사람아


그래,

淸風에 날려 왔나

玄鶴을 타고 왔나


자넨

墨이나 갈게

慈雨茶 끓임세


'어이, 친구!' '오, 그리운 벗이여!' 

이 어떤 말보다 더 친근하고 정감있는 말 바로 ‘자네’가 아닌가.

 

이런 편안함 때문인지 서울 인사동엔 ‘오 자네 왔는가’라는 찻집이 있고, 전북 고창 선운사 들머리 찻집엔 이 시가 나무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가면서 이젠 자네라고 부를 사람마저 많지가 않다.

다들 '자네'였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고, 높은 사람이 되고, 먼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정은 가고 기억만 남아있는 사람들이니...

 

'자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