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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봄날의 시 한 편

by 호호^.^아줌마 2009. 4. 24.

여성칼럼  봄날의 시 한 편


 

작년 봄 걸어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물로 들어 온 난유 포장용기인 앙증맞은 크기의 사기 암탉 몇 마리, 그것을 버리기가 아까워 나무로 만든 새집과 함께 매달아 두었다. 오늘 아침 겨우내 묵혀두었던 화단을 손질하던 남편이 희색이 만연해 들어왔다. 

 

남편의 말인즉 무심코 그 빈 집을 들여다보다 둥지를 튼 작은 새와 얼결에 눈을 마주쳤단다. 건축주의 허락도 없이 이삿짐을 옮긴 셈이다. 화들짝 놀라 뛰쳐나가는 품새로 보아 몰염치한 품성의 임차인이 아니어서 다행이랄까. 이부자리 격인 풀더미의 두툼한 두께와 따스한 온기로 보아 기거 시일이 꽤 지난 것 같단다. 집 없는 떠돌이에게 안온한 집을 제공하는 큰 덕을 베푼 셈이니 우리 부부의 올해 복록은 무궁무진할 테고.

 

새는 아직 혼자일까, 이제 곧 짝을 구하는 중일까. 해맑은 봄날 파밭을 매다 말고 무궁무진 나래를 펴보는 시 구절 속 풍경이다.

 

시 속 화자는 연세 지긋한 어머니다. 그 분의 허리가 불편하셨던가. 당신의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인다하셨다. 만개한 꽃도, 튼실한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란다.

 

이어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에게 당부하신다.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라고, 그래도 큰 아들인 네가 아버지께는 좋은 의자 아니었냐고. 그리고 당신은 좀 누워 쉬다가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주시겠단다. 밭의 참외도 호박도 모두 식군데 깔고 앉아 생을 누릴 의자를 내줘야지 하시던 어머니. 끝으로 아들내외에게 당부하신다. 아옹다옹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 거냐고, 그늘 좋은 데다 의자 몇 개 내놓는 거라고.

 

맞다. 애 낳고 사는 게 별 거 아니듯이 해마다 봄이면 그토록 나를 몸살 나게 하는 시라는 것도 별 거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언제 어떻게였는지

나도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닌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는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그 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봄날 꽃 흐드러진 들길을 걷다가, 여름 해변 모랫벌을 걷다가, 가을 텅 빈 바닷가의 호젓함에서, 겨울 순백의 눈길에서, 그런 장소뿐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가녀린 어깨에서, 아가의 천진한 눈망울에서, 늙으신 어머니의 슬픈 눈동자에서 시인은 시를 운명적으로 만났을 것이다.

 

힘든 누군가를 향한 작은 배려가 피워내는 정겨운 풍경이 시가 아닐까. 아지랑이는 추위에 움츠렸던 만물의 기력을 북돋아 주느라 기진한 봄의 어지럼증이려니 어느 절기보다 봄에 풍부한 시가 깃들어 있는 이유다. 바짝 마른 논에 넉넉히 물을 대고 써레질하는 아재의 부지런하고 능숙한 손놀림에는 생의 찬가를 읊은 시가 더듬거려지고 요 며칠 내내 모과 그 분홍꽃 송이 송이마다 어른대던 눈부신 시구(詩句)!

 

속잎 돋는 봄이면 속잎 속에서 울고, 천둥치는 여름밤이면 천둥 속에서 울며, 비 오면 빗속에 숨어 비 맞은 꽃빛깔로 노래할 우리의 귀한 이웃 작은 새를 염려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는, 새의 맑은 눈과 잠시 마주친 내 남편의 선한 눈빛에서도 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