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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여행기

유감천만 이 사진

by 호호^.^아줌마 2009. 6. 3.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했거늘...

- 양아치 같은 양키들 -

 

갑작스럽게 나주를 찾은 知人을 모시고

동신대 영상박물관을 들렀습니다.  

오래전 故 이경모 선생이 기증한 카메라와 사진들을 모아

이 박물관을 열때 취재하러 들렀을 뿐 그동안 왔다갔다하면서도

별 관심없이 봤던 사진들이었는데 오늘은 좀 유심히 보게됐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진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부아가 치미는 것입니다.

 

 

사진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한국전쟁중인 1951년 6월, 임시수도 부산 부민동의 이기붕 국방장관 관사.

2층짜리 적산가옥을 개조한 관사 안방에는 흰 저고리 검정치마 차림의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앉아있고,

양옆으로 ‘초대받은 손님들’인 무초 주한미국대사와 콜트 장군이 보입니다.

다과상과 커피잔 등으로 보아 다과모임일 듯한데, 외국 손님들의 방약무인한 자세가 가관이죠.

  신사화를 신은 채 방석 위에 겨우 엉덩이를 붙인 엉거주춤한 모습의 박마리아 왼쪽의 무초 대사는

잔뜩 찡그린 표정과 함께 시선을 외로 꼬고 있습니다.

그 옆 콜트 장군은 한술 더 뜨고 있군요.

시커먼 군화를 이 모임의 호스트인 박마리아 앞쪽으로 쭉 뻗고 있습니다.

(콜트의 군화 위치는 실은 이기붕의 코앞.

畵角·화각이 넓지 않은 50㎜ 표준렌즈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진 왼쪽에 겨우 잡힌 손목의 주인공이 바로 이기붕.
이기붕 양옆에는 김활란과 벤 프리트 장군이 앉아있었다고 함.)

 

이 사진의 분위기를 한층 절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문밖에 도열한 이화여대생 ‘노래사절단’이랍니다.

한껏 단정하게 차려입어 예의를 갖춘 학생들이 막 입을 모으고 있지만,

여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상징성 높은 이 사진을 소설가 천승세의 단편소설 ‘黃狗(황구)의 비명’과

비교해 볼만하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무래도 작품이 주는 울림이 큰 쪽은 이경모의 사진인데요, 

우리네의 누렁이가 위에 올라타 흘레붙으려는 덩치 큰 외국산 개에 눌려 헐떡이며 깨갱거린다는

천승세의 소설은 상당부분 작위적인 설정인 데 비해 이경모의 이 사진은

어떠한 군말도 필요없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현지 국가 고유문화에 대한 존중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반세기전
한·미 관계를 상징하는 절묘한 포착으로 유명한 이 사진은

초창기 보도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백미로 꼽힌다고 합니다.

 

작가는 동신대 객원교수로 계셨던 故 이경모(1926~2001) 선생이시구요,

당시 노산 이은상이 부사장겸 주필로 있던 호남신문의 사진부장을 지냈고,

이후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사진대 문관으로 활동하며 신탁통치 논란, 좌우익 격돌,

여순사건과 6.25등의 현장을 두루 증언하면서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작가입니다. 

 운 좋게 영상박물관으로부터 이경모 선생의 사진첩을 한권 선물받아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스캐닝한 것입니다.

(앗, 이거 저작권보호법에 걸릴수도 있겠죠?)

 

 

위↑ 사진은 '잔설'이라는 주제로 1946년 3월 나주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예술이죠?

 

이경모 선생에 대해서 한 말씀 더 드리죠. 

 그는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단정한 성격이었으며 개인사도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나주사람은 아니고 광양에서 났는데 1997년도에 동신대가 문을 열면서

이 학교 객원교수로 근무한 인연으로 이런 귀중한 보물들을 나주에 남겨놓고 가신 거죠.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영상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가운데 한참이나 시선을 붙드는 사진들은 여순사건의 기록들입니다.

여순사건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48년 10월19일 밤에

제14연대 1개 대대병력이 일으킨 반란이 그 시발인데요,

 이튿날인 20일 출근하면서 이 소식을 접한 그는 ‘현장에 가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판단에 따라

곧바로 시가전이 한창인 순천을 찾습니다.

취재장비는 필름을 단 한 장만 장착해 단발승부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일제 오토프레스 미놀타.

  순천지검에 설치된 반군토벌사령관 송호성 준장의 22일 기자회견장에
유일한 사진기자로 참석한 것도 그였습니다.

그가 좌우익 충돌의 참상을 담은 중요한 사진을 연속적으로 얻은 것도 바로 이 무렵이고요.

그는 24일 광양 쪽으로 대로변 11㎞를 걸어가면서 무수하게 널린 경찰과 반군들의 시신과

이 사이를 비집고 남편 동생 등을 찾아내려는 젊은 아낙들의 비통한 모습을 렌즈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을 지금 동신대 영상박물관에서 전시중입니다.

공간이 비좁아 몇몇 작품만 전시하고 있다는데

전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 작품이 있습니다.


신발이 가지런히 비어져 나온 채로 멍석에 둘둘 말려 지게 위에 올려져

대강 수습된 시신, 그 앞에서 석양으로 그림자를 길게 늘인 아낙이

자신의 옷고름을 쥐고 울음을 삼키고 있는 비통한 장면도 있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는 비극의 리얼리티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시신의 주인공이 이경모의 손아래 친구라는 점입니다.

이경모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은 당시 서울대 법대생 김영배군이었는데요,

당시 현장은 광양과 순천의 경계부근이었고, 이경모는 집안머슴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친구의 어머니를 달래는 한편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고 합니다.

‘영배야,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연방 되뇌이면서...

 

어줍잖은 실력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좀 더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성급하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습성이 그렇습니다.

좀 더 역사의식을 갖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담아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다짐을 굳게 해봅니다.

 .

.

그러면서 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런 걸 담아왔습니다.

 

 

동신대 도서관 건물 옆에 얕으막한 산이 하나있는데,전에 못 보던 것이 생겼군요.

希  望  路

 왠지 모를 부러움과 설렘으로 한참을 쳐다보다 결국 카메라를 꺼내고 말았습니다.

 

 

저 풋풋한 청춘

저 싱그러운 잎사귀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도전할 수 있는 젊음이라는 시간...

 

 

젊은 저들이 통과하는 저 희망로에

나도 한번 올라갔다 와볼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왔습니다.

 왠지 내 모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저 젊은 그들의 모습에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희망이라는 글자를 담을 마음의 그릇이 준비가 안된 것 같아서죠.

 

 

하지만 내일이나, 모레나...

아니 그 언제라도 한번 저 길을 올라갔다 내려오려고 합니다.

내 마음에 희망의 샘이 마련되는 그 날에는요.

 

여기까지 읽어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드리는 뜻으로 드립니다.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정희성 시/최영주 곡.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