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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이야기

다산의 남도유배길

by 호호^.^아줌마 2009. 6. 9.

다산의 남도유배길

 가보고 싶다 다시 한 번...

 

 최근 걷기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다산 유배길이 문화관광부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선정됐다.

 

다산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은 다산 수련원을 시작으로 출발한다.

 

다산의 정신과 사상을 교육하기 위해 마련된 곳인데, 건물 주변에 동상과 49개의 명언비로 꾸며진 다산 말씀의 숲 등 테마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수련원 뒤편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다산초당을 만나게 되는데 다산초당은 실학자 정약용이 10여년 간 머물렀던 곳으로 목민심서 등 6백여 권에 달하는 저서의 산실이기도하다.

다산초당가는 길     

 

다산이 강진에 도착해서 4년간 기거했던 주막 사의재는 2백 년만에 복원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차밭에 서리가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바람개비를 설치해 놓은 풍경이 이국적이다.

 

차밭을 지나 고개를 넘어가면 단아한 사찰 무위사가 편안하게 다가선다. 무위사는 극락보전 등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다산의 남도 유배길은 옛길을 찾고 가꿔간다는 취지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길인 삼남대로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데 영암 구림마을까지 모두 55km 에 이른다.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가는 남도의 산하를 바라보며 다산이 걸었던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을 따라가 보자.

 

 천일각에서 강진만을 바라본다

 

다산초당을 오르며 귀양길의 다산을 생각하다

1801년 11월 차가워진 날씨에 오랜 국문에 시달리느라 성치 못한 몸을 이끌고 형 약전과 함께 유배 길에 올랐다. 나주 율정점(밤남정)에 이르러 형제간의 애끓는 이별을 하고는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떠났다.
다산의 ‘율정의 이별’이라는 시를 보면 애끓는 형제지정이 잘 나타나 있다.

초가 주막집 새벽녘 등불은 꺼질 듯한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설움에 겨워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말 잃어
치솟는 슬픔에 목이 메인다

흑산도는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 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고래는 어찌하여그 속으로 가시나요

고래는 이빨이 산과 같아서
배를 삼켰다가 다시금 뱉아낸다오

지네는 크기가 쥐엄나무 껍질 같고
독사가 등나무 덩굴처럼 엉켜 있다오

내가 장기에서 귀양살이 할 때는
밤낮으로 강진의 형님을 생각했다

날갯죽지 활짝 펴고 푸른 바다 뛰어넘어
바다 가운데서 저 형님 보려 했는데

지금 나는 높은 나무에 오른 귀양살이니
밝은 진주 없어진 빈 독만 산 것 같구나

또 미련하고 어리석은 아이처럼
망녕되어 무지개 붙잡으려고

서쪽 언덕 바로 옆에
아침 무지개 분명히 보이나

아이가 무지개를 쫓아가면 멀어만 가듯
잡힐 듯한 흑산도는 서쪽으로만 달아나네


 동암(다경각)

 

 형과 헤어진 다산은 강진에 도착해 보니 유배온 사람이라

아무도 반겨주지 않고 모두 냉대할 뿐이었다.

강진읍의 어느 조그마한 주막의 처마 밑에 병든 몸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주막의 여주인이 자그마한 방을 내주고는 거기에서 기거하게 하였다. 


다산은 강진 주막에 머물고 있을 때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마땅히 네가지를 해야 할 방’이라는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하였으니 매사에 경계하고 삼가는 태도로 스스로를 다스리자는 다짐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나이만 먹고 뜻한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 서글퍼져 스스로를 돌이켜보고자 정약용은 이곳에서 ‘사의재기’ 지었다.


생각은 마땅히 밝게 하되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하고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며
엄숙하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엄숙함이 있도록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요점이 전달되지 않으면
더욱 잔말을 줄이고

행동은 무겁게 하되
무겁지 않으면

더욱 중후하게 하라



 그 후 4년여가 지나면서 어느 정도 바깥출입에 대한 감시가 소홀하게 되면서 혜장선사를 만나게 된다.

 

10년이 어린 혜장과 주역을 논하면서 서로 차 마시기를 즐겨하였던 것이다. 혜장의 도움으로 강진읍 우두봉 기슭에 있는 고성암에 거처를 정하고는 거처하는 방을 ‘보은산방’이라 하였다.

 

혜장은 산방으로 자주 넘어오고 다산도 백련사를 자주 찾아갔으며, 4년이 지난 1808년에 윤단(尹慱)의 산정이 있는 지금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과 혜장은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더욱 자주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고가며 서로 학문을 논하고 차를 함께 하였다.


다산은 혜장의 소개로 알게 된 초의와 그 인연을 이어가게 되는데, 초의가 서울에 머물 때는 다산에 의해 동갑내기 추사와 초의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후 이 둘은 40년간 교분을 맺게 된다.

 

학문과 차로 맺어진 이들 3인 아니 혜장을 포함한 4인의 인연은 아주 특이하면서도 각별하였던 같다.

 

그런 인연이 있는 다산초당과 백련사, 그리고 수종사. 이 여행이 끝나면 백련사에서 맘껏 들이킨 이 신선한 바람을 수종사에서 다시 느껴보마 생각하면서 돌출된 나무뿌리가 인상적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오르니

소나무에 둘러싸인 사위는 마치 해가 다 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산초당을 가운데에 두고 동쪽에는

 

다산이 주로 집필을 하였던 다산동암과 서쪽에는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암(다경각)이 있고,

후세 사람들이 다산4경이라 부르는

‘정석(丁石)’,  ‘약천(藥泉)’, ‘다조(茶竈)’, ‘연지(蓮池)'를

차례차례 둘러보는데, 다조를 보는 순간 가슴

저 밑에서 무언가 뜨거움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산동암. 보정산방이라는 현판도 보인다.



 

평평한 돌을 어디에선가 구해 와서는 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기를 보고는 샘을 만들었을 테고, 그 샘물로 차를 끓이면서 평평한 바위를 찻상삼아 사색에 잠겼을 한 인간을 생각하니 말이다.

  

 정조시대에 쌓아왔던 모든 업적과 개혁의 성과들이 일거에 무너지고, 큰 형 약종의 참수에 이어 작은 형 약전과의 귀양길에서의 이별, 그리고 약전의 죽음.

 

강진에서 연을 맺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위해 관리가 해야 할 일들과 알아야 할 일들에 대해 수많은 책을 집필하는 것으로  그 형극의 세월을 치환하면서 살았던 다산의 삶을 생각하니 그저 숙연해질 뿐이었다.

 

다산이 혜장을 만나기 위해, 혜장이 입적한 후에는 초의를 만나기 위해 걸었을 그 오솔길을 다시 한 번 오르고 싶다.

      

 

                                                                         저 바람처럼 춤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