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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자린고비이야기

by 호호^.^아줌마 2009. 7. 17.


자린고비이야기


무심코 틀어두었던 아침 텔레비전이다. 그런데 부자비법을 알려준다는 주제에 화들짝 놀라 채널을 돌렸다. 이웃이 돌린 떡 접시까지 돈으로 환산해 기록하는 알뜰가계부의 주인공, 언젠가 읽은 여성지 수기의 그 불유쾌한 기억 때문만도 아니리라. 그러니 경제에 보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예민한 거부반응이다.

 

서점가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재테크 비법, 몇 년에 얼마 모으기 따위의 경제전략서 아닌가. 한데 그 코너 서가는 아예 오물 피하듯 빙 돌아다니는 나이고 보면 목하 황금만능 시대에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어쨌든 난 부자비법에 솔직히 소질도 없고 딱히 귀 기울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올해로 결혼 5년차에 접어든 아들, 그야말로 자수성가로 시작해 어찌어찌 억대의 전세자금을 마련했으니 내심 치하할 만하다. 그에 얻은 자신감일까. 대뜸 기한까지 정하며 3억을 목표로 열심히 뛰겠다 당당히 선포했다. 아들의 그런 원대한 가계경제계획의 수립한도 년 수조차 귓등으로 흘려듣는 어미이니 내 허술한 경제관을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너도나도 지갑을 꽁꽁 여미는, IMF 때보다 힘들다는 아우성이 창궐하는 요즘이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고 작은 부자는 절약과 근면이 낸다 했다. 무시무시한 세파를 헤쳐 나갈 아들의 전도가 은근히 걱정되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떠올려 보는 역사 속 자린고비 일화다.

 

조륵은 충북 음성 출신의 구두쇠다. 자신의 집 간장을 발에 묻힌  파리를 쫓아 무려 200리를 뛰었다던가. 생선, 고기는 상에 올린 적도 없었다. 어느 날 이웃들이 작당하여 조륵의 마당에 생선을 놓아두고 동태를 살폈다. 조륵은 깜짝 놀라 ‘밥도둑이 들어왔다’며 소릴 지르며 바깥으로 생선을 내던졌다. 생선을 먹으면 밥맛이 당겨 밥을 더 먹게 되니 밥도둑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전국에 알려진 그의 구두쇠 비법을 전수 받으려고 찾아온 이가 허름한 그의 집을 보고 먼저 놀랐다. 불기라고는 없는 구들 갈라 터진 방, 다음날 밤새 바람이 새어드는 문풍지를 바른 창호지를 뜯어가는 전라도 구두쇠를 허둥지둥 뒤쫓아 온 조륵의 말은 기가 질리게 한다. 종이는 당신 것이지만 밥풀은 자신의 것이니 떼어놓고 가라했다는 대목도 그렇지만 체면, 예의, 신용 이 세 가지를 철저히 배척했다는 조륵, 그에 얽힌 일화를 읽는 내내 눈살 찌푸려지는 삽화가 적지 않았다. 

 

전 고 사 일찍이 돈 모으는 창고라 하여 전사(錢舍), 혹은 그가 속한 고을 절반을 살만큼의 재력가라 하여 매반주(賈半州)라 부르던 중국의 유명한 자란고비가 가원외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의 관 값이 아까워 소구유를 쓰라 명했다.  크기가 안 맞거든 자신의 시신을 토막 내어도 좋다.

 

하지만 행여 딱딱한 뼈에 날 닳을 것이 염려되니 도끼만큼은 반드시 이웃 것을 빌려서 써라 아들에게 신신당부 유언했으니 조륵과 막상막하, 난형난제, 용쟁호투다. 그 조륵이 영조로부터 정 3품의 벼슬을 하사 받았다는 것, 또한 후세인들이 비석을 세워 그를 기렸다는 게 기이하지 않은가. 비록 입을 댈 수 없을 만큼 짠 굴비일망정 조상의 제사상을 위해, 기꺼이 제 천성까지 어겨가며 구입한 그 극진한 효성 덕택이냐고?

 

조륵은 60세 환갑날 이웃들을 불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토록 자린고비 행태를 보인 연유를 눈물을 흘려가며 설명했다.

 

이후 때마침 영호남을 강타한 흉년을 비롯, 어려운 이웃의 구휼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풀었다. 자린고비의 어원이 제사 때 쓰는 지방 종이를 기름에 절였다 다시 쓰는 절인 고비의 구두쇠를 이르는 말이라던가. 물론 조륵의 비석 명은 자린고비가 아니라 ‘자인고비(慈仁高碑)’다. 부디 아들의 재물이 세인의 눈총 받으며 모은 짠물 흐르는 재물이 아니기를, 경제 까막눈 어미의 간절한 기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