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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 아름다운 정원

by 호호^.^아줌마 2009. 7. 31.

김현임 칼럼… 아름다운 정원

 

 뜻밖의 제의였다. 텔레비전의 정규 프로에서 우리 집 뜰을 소개하겠단다. 평범한 시골 마당의 빈자리 군데군데 닥치는 대로 꽃과 나무를 심어 놓았을 뿐인데, 굳이 자랑거리라면 욕심껏 들여놓은 장독들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이던가. 마당에 들어 선 이의 ‘이 집 사람들 얼굴 볼 필요가 없다’는 혼잣말이다. 이어 이렇게 집을 예쁘게 꾸며놓은 사람들이니 그 마음이야 오죽 곱겠느냐는 과찬의 말씀이고 보면 匹夫匹婦에 불과한 우리 내외는 토종꽃 흐드러진 마당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솔직히 참으로 고운 꽃이 만개할 즈음 부족한 나는 여왕처럼 거만해진다. 데데한 발걸음으로 마당을 거니는 나의 그 교만함이 꽃 덤불 속에 숨길 수 있음이 다행이다. 

 

 

오늘 아침도 내가 왜 이다지 거만하고 교만한가. 그 이유는 옮긴 후 노심초사 4년 남짓 지켜 본 치자나무에 있다.

 

밀크빛도 좋고 유백색도 좋다. 드디어 탯자리 옮김앓이의 몸살을 끝내고 터 잡기에 성공한 갸륵한 나무다. 더구나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진초록, 생명력 뚝뚝 떨치는 그 싯푸른색 사이사이 피어난 크림색 향기로운 치자꽃 앞에서 나는 그만 아찔하다.


 ‘蓼蓼者莪/非莪伊蒿/哀哀父母/生我劬勞’


 ‘아름다운 쑥이 되라더니

  쑥 아닌 다북이로다

  슬프도다 우리 부모님

  나를 낳으시느라 얼마나 수고했소!


중국 고전을 번역한 분의 책머리였다. 그 분은 시경의 이 시에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莪(아)는 아름다운 풀이요. 蒿(호)는 천박한 풀이란다. 부모가 자식을 길러 아름다운 인재가 되기를 원했으나 천박한 인간이 되어 효를 실천치 못함을 자책하는 시이기 때문이리라.

 

일찍이 왕포(王褒)라는 이는 이 시가 실린 육아편을 차마 읽지 못하여 폐기하고 말았다던가. 부디부디 올곧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찌 자식 기르기에만 해당할까. 시골 생활하며 기르는 짐승, 식물 가꾸는 손길에 간절한 기원의 마음이 깃들지 않은 순간은 없다.

 

특히 나약한 풀잎들이 간신히 피워낸 꽃들을 바라보면 스며드는 자랑스러움이라니! 머리에 어사화 꼽고 귀향한 자식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부모의 눈길이 영락없이 그러할 테다.

 

 아름다운 정원의 기준은 무엇일까. 마당에 내려서기 무섭게 뛰어드는 다섯 마리의 강아지, 그리고 네 마리의 고양이 일가도 무사하고, 집 입구 늘어진 배롱나무 꽃 붉음 갈수록 창창하다.  봉숭아, 채송화, 점박이나리, 나팔꽃, 개미취, 여름국화, 사철화, 맨드라미, 백일홍, 그리고 치자...... , 이런 꽃들의 이름을 때론 어여쁜 자식인 듯, 때론 그리운 벗인 듯 호명할 수 있어 무한히 행복하나니. 한적한 마을의 나 같은 촌부에게 ‘정원’이라는 단어는 감당 못할 호사다.

 

다만 우리 집 마당의 식솔들은 올 여름도 씩씩하고 건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