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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 책을 잃다

by 호호^.^아줌마 2009. 8. 16.

김현임 칼럼… 책을 잃다


40킬로 대에 머물던, 하여 갈비씨를 뜻하는 이른바 KBS, 혹은 간짓대라 불리던 학창시절 빼곤 처음이다. 요 근래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급작하게 줄어버린 몸무게로 그 시절 이후 내 몸이 가장 가벼워진 것, 아니 말라버린 것이다.

 

주변 사람에 대한 실망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게다가 꽤 긴 시일 추진하던 일은 자꾸 미뤄지고 나로선 견딜 수 없는 부피의 스트레스였다.

 

자꾸 되뇌어지던 낱말이 과부하(誇負荷)였던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지고 뒤뚱거리는 형상, 가슴에선 종종 메케한 탄내가 맡아졌다. 그걸 식힐 물이라고 착각했던가.

 

평소 그다지 친하지 않던, 의도적으로 마신 술이 원인이었다. 누군가 곁에 둔 가방을 슬쩍해버린 것도 모를 정도가 되고 말았으니. 분명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다. 또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했으니 전적으로 내 탓이다. 사랑땜도 못했다는 말이 맞다.

 

겨우 한 달이나 됐을까. 악어무늬의 가죽가방은 망설임 끝에 거금을 주고 구입했지만 그리 아깝지 않다. 또한 딸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고가의 화장품들도, 몇 만원의 현금도, 누군가 읽을까 겁이 나는, 그야말로 내 속마음을 날 것으로 적나라하게 기록한 두툼한 두께의 메모장도, 몇 장의 신용카드도, 보라색 가죽에 큐빅 장식 붙은 손지갑도, 두 벌의 새 옷도....... 그러고 보니 아이구! 나는 가방에 무엇을 그리도 많이 집어넣고 다녔을까. 

 

가장 애석한 건 책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별을 돌아보고... ’로 시작되는 ‘어떤 사람’이라는 시를 처녀 시절의 내가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그 신동집 시집을 비롯한 다섯 권 남짓의 책들도 그렇지만 나는 정말 한 권의 책이 아깝고 아쉬워 며칠 동안 전전긍긍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가 보지 않는다면 아이처럼 펑펑 울고도 싶었다. 바로 사마천의 ‘사기’다. 갱지 느낌이 나는 조악한 지질이지만 요 근래 나는 그 낡은 책에 흠뻑 빠져 지내지 않았던가. 사기야 진즉 세 번쯤 읽었고 두어 권쯤 양장본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일목요연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책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내게 책은 그랬다. 고단한 현실에서 잠시 유예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 무심히 실로 무심히 발길 머무는 곳, 낡은 목책의 문을 밀고 들어선 고향집  같은 느낌이랄까. 내 손길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교체하지 않고 둔 정든 울타리, 누군가 봐주지도 않는데 절기 잊지 않고 피는 고향 집 마당 꽃의 정겨움 닮은 책이 주던 그 정서가 너무도 그립다.

 

졸지에 놓쳐버린 정겨운 이의 손길 인 듯 순간순간 사무친 감정에도 휩싸인다. 그런데 어리석은 나는 그 책의 출판사조차 기억해 내지 못한다. 하긴 애써 기억해냈다 한들 오래 전 절판되어 구할 수 없으려니 더더욱 서글프다.

 

우리가 살면서 불시에 잃게 되는 소중한 것이 어디 한 둘일까. 사랑하던 뭄타즈마할이 죽자 샤자한 그 사내의 머리가 하룻밤 새 회색으로 탈색되고 말았다던가. 그 충격에 비할까만 무려 오 킬로 가까운 체중 감량, 쑥 들어간 눈두덩이로 내가 열심히 줄 그어가며 읽던 사기, 그 책이 주는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