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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 '골목길 나의 집'

by 호호^.^아줌마 2009. 12. 6.

 

 골목길 나의 집

 

아침부터 추적거리는 겨울비 탓인가. 마음이 한없이 깊어진다. 무심코 들어선 손님 없는 식당, 술 시간으론 이른 오후 세시다. 우리가 거치지 않은 날들에 대해 감히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을까. 이 모두가 뭔가 옛일을 돌이켜 되새기게 하는 이 충충한 날씨 탓이다.

 

언제나 로맨스그레이, 멋쟁이 아니시던가, 희수(喜壽)에 이른 회장님의 회색빛깔 와이셔츠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주황 넥타이를 먼저 화제에 올렸다. 우리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일시에 깨트리는 이 화두를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서로의 견해를 밝히는 논쟁은 깊다 못해 사뭇 다툼이 일 기세다. 보글거리는 청국장과 2인분의 생고기를 안주 삼아 잎새주를 마시며 최근 발표된 친일명단에 대해 갑론을박 중인 우리 세 사람이다.

 

‘도솔천 하늘을 구름 되어 떠돌거나, 천 길 물속을 비 되어 흘러도 춘향은 결국 도련님 곁에....’라 읊었던가. 서정주 선생의 이 시 대목이 마치 그의 변명처럼 떠올랐다.

 

애초 우리 이야기의 주체가 된 건 소설가 이광수였다. 노 회장님의 변호에 따르면 “얼마나 시달렸으면 버티다, 버티다 종국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겠느냐”는 옹호론이다. 심약한 성품의 문인, 당시의 상황... 그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머릿속은 요 근래 우리의 산야를 점령한다는 외래종 덩굴식물 가시박이 무성해진다.    

 

반복과 지속성을, 자발성과 적극성을 따져 생계형 부일 협력자는 제외하되 권력, 부, 명예를 좇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해 객관적 기준에 철저히 따른 발표라 했다. 그런데도 ‘좌파들의 정치적 목적’이라는 일부의 색깔 논쟁적 저항도, 몇몇 유족의 항의성 고발도 이어졌다. 하긴 서슬 시퍼런 당시로 가면 어느 누가 자유로울까. 이 또한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마침 군대 간 아버지께 보낼 돈을 헤아리는 중에 들이닥친 한 무리의 남정네들이었다. 밥은 할머니가 하실 수밖에 없었단다. 치마폭에 감춘 돈다발 때문에 꼼짝 못하고 들어야했던 이른바 공산당 학습, 그것이 얼마나 지겨웠으면 이후 누군가 당신에게 긴 얘기를 늘어놓을라치면 ‘아이구, 공산당!’ 하시며 체머리를 흔드시는 고질이 생기셨을까.

 

며칠 후 만삭의 어머니는 산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는 죄목으로 지서에 끌려가 며칠 구류를 사는 고초를 겪었다.

친일 명부에 오른, 필부필부가 아니었던 분들에게 품는 이 서운함의 근원도 실은 내가 그 분들에게 품고 있었던 높은 기대의 소치가 아닐까. 총칼 들이대며, 혹은 젊은 날의 우리 어머니처럼 그날 자신들의 어쩔 수 없는 처지가 그 쪽으로 내몰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쨌든 잘못은 잘못이라는 내 생각은 철회할 수 없다. 뒤늦은 친일명단 정리의 목적이 논공행상이 아닐 터, 불행하고 불행한 역사를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부끄러운 고백의 반성문일 따름이다. 그 반성문을 읽으며 호젓이 우리 스스로를 도사려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생태계 교란이라 했다. 깊은 생각 없이 내던진 외래종 씨앗 한 알이 우리 산야의 푸른 소나무를 뒤엉켜 고사시키듯 역사를 꼼꼼히 톱아 보지 않고 올바른 역사를 이어갈 수 없다. 꽃과 쓰레기가 뒤섞인, 소제되지 않은 지저분한 내 집 앞 골목길은 한시 바삐 치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