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어린 위로자

by 호호^.^아줌마 2010. 4. 6.

김현임 칼럼…어린 위로자

 

이사하는 딸아이의 짐을 싣고 가는 길, 일이 꼬이려니 하필 화물차 안에서 받은 전화였다. 행운은 도적처럼 온다고 꿈꾸어 마지않던 구직이란 파랑새는 그만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서운함이 준 여파려니, 아이들에게 내색도 못하고 짐을 부려놓기 무섭게 자리보전하고 끙끙 앓았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누군가 간지럼 태우듯 가만가만 흔드는 기척에 눈을 떴다. 그림 그려주세요, 책 읽어주세요, 손녀아이가 제 들 수 있을 만큼의 책을 들고 와 머리맡에 앉는다.

 

고 해맑은 눈빛의 청을 차마 거역 못하고 나비가, 사자가, 꽃송이가 주인공인 책들을 건성으로 읽는 참으로 성의 없는 할머니인 나. 서툰 손길에도 금세 제 빛깔을 얻는 도화지 속 뭉게구름도 창공의 새도 할머니는 흥이 없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열에 요 귀찮은 녀석을 떼 낼 적당한 핑계거리가 없나 두리번대던 내 눈에 들어 온 서가의 책이다.

 

‘명수필’이라는 꽤 두툼한 책자다. 호기심을 자극할 그림이 없으니 제풀에 떨어져나가리라 기대했던가. 웬 걸? 이제 막 글자를 익히기 시작한 녀석을 꼬드겨 더듬더듬 한 자, 한 자 읽히는 맛이 꽤 괜찮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명성 높은 필자들 사이에 낀 내 이름 석 자에 반가움과 부끄럼이 교차한다. 살면서 우리에게 이리 큰 부피의 기꺼움을 주는 사건도 터지는가. 사진 속 할머니를 용케 알아 본 손녀의 고 작고 예쁜 입을 통해 듣는 ‘이’, ‘리’, ‘기’, ‘르’, ‘기’, 그러니까 내 글제라니!

 

작가의 가장 보람된 순간은 독자의 입을 통해 다시 듣게 되는 자신의 작품이라 했다.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는 손녀, 그 천진한 목소가 선사하는 묘한 파장의 감격에 못난 할머니는 눈시울까지 뜨거워진다. 까짓 세상사야 어찌 되건 나는 다 이루었으니 이젠 그 어느 것도 쓸 데 없다의 포만감마저 드는 것이다.

 

힌두교도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삶을 운영하는 네 개의 사이클이 있단다. 어릴 때는 배우고 익히는 ‘학생기’로 살고, 철들면 일, 결혼, 부모 노릇하는 ‘가주기(家住期)’로 살고, 늙으면 모든 걸 자식에게 물려준 뒤 숲으로 들어가 유유자적하는 ‘임주기(林住期)’로 살며, 생의 마지막 주기, 그러니까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순롓길로 나서 흘러다니는 ‘유행기(流行期)’로 사는 게 그것이란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자연의 일부로 보아 그에 고분고분 순응하는 것이니 딸아이를 끝으로 자식들 뒷바라지 어지간히 끝낸, 바야흐로 고요로운 숲길의 입구에 접어든 내가 아닌가. 그러니 아직도 안달복달 기웃댈 그 무엇이 있는가 싶어진다.

 

할미 팔에 기대어 잠든 손녀, 그 어린 위로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드는 감사함이다. ‘잘했어요. 고맙습니다. 아름다워요. 사랑해. 보고 싶어. 기다릴게. 당신을 믿어요.’ 진분홍 바탕에 흰 꽃 벙그러진, 생의 잠언처럼 다가오던 어느 백화점의 광고문구였다. 정말이지 이젠 그런 말만 하고 살아도 짧지 않을까.

 

제 아빠 엄마가 오자마자 손녀는 할머니의 페이지를 펼쳐주라 조른다. 그 맑은 눈에 어리는 은근한 자랑스러움, ‘네가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면 그 정성이 네 운명까지도 바꾸리라’ 했던가. 조손(祖孫) 사이에 오가는 존경과 사랑의 하모니에 그래 난 헛살지 않았구나 싶은 안도감, 삶이란 참으로 단맛 나는 샘물이 도처에 숨어있는 오아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