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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시인

세모(歲暮)이야기 / 신동엽

by 호호^.^아줌마 2010. 11. 30.

 

세모(歲暮)이야기

 

                                                                      신동엽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멀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조용히 나를 드려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건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왜 이리 찬가 묻기에, 삘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女人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찬란한 명동이 아니어도, 동지만 지나면 해가 쪽제비 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 연안 양지쪽 쪽마루에서 새순 돋은 무를 다듬고 계실 눈 어둔 어머님을 위해 이 세모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얀단 말인가.


  문경새재, 산막(産幕) 곁에 떡가래 구어 팔던, 그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 소녀도 지금쯤음 누구 팔에선가 지쳐 있을 것이다.


  꿀꿀이 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 그 소년의 염원이 멎어 있는 그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또 얼마나 다숩게, 그 옛날 그렷적의 목홧단 말리던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花潭)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眞伊) 분위기로 그 체온들이 뿌려진 판문점 근처에 서서히 서리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한강 기슭이라도 산책하련다, 이 세모에. 어느 날이었던가. 젊은 연인끼리 인천바다 언덕 잔디밭에 불을 질러 놓고, 오바깃 세워 팔짱끼던 그 말없던 표정들처럼, 나도 겨울벌판을 혼자 산책이나 하며 내 한 해의 상흔 자죽들이나 생각해 보아야지. 

 

 

 

성탄의 불빛은 분명 저런 휘황찬란한 전구등이 아닐 텐데

12월이 되면 예외 없이 도시와 농촌을 밝힌다.

그 앞에 서 있는 꼬맹이는 그래서 12월이 좋단다.

 

나는 내 마음의 호롱불을 켜고 싶다.

그때 그 마굿간에서 출산의 고통을 오롯이 겪었을 마리아를 위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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