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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나주 목사고을시장 사람들⑱ 송금상회 김성학 사장

by 호호^.^아줌마 2014. 12. 28.

기획연재…나주 목사고을시장 사람들⑱ 송금상회 김성학 사장

 

“리어카에 큰애 태우고 작은애 업고 댕기며 장사했지”

 

 

송금상회 김성학 사장 “몸 고달파도 자식들 대학등록금 낼 때면 뿌듯”

갈퀴, 쇠스랑 쓸 일 줄었지만 필요한 사람 위해서라도 가게 문 열어야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지난 2012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들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시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온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 12월의 첫 장날, 부슬부슬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김장준비를 위해 시장을 찾는 사람들로 목사고을시장은 대목장을 맞은 듯했다.

 

채소노점상에는 속이 꽉 찬 배추와 묵직한 무 다발이 산처럼 쌓여있고, 오일시장동 생선가게는 김장김치에 게미를 더해 줄 싱싱한 젓갈과 굴, 석화가 하나 가득이다.

 

북적이는 장옥을 지나 시장 북편으로 나가자 사람들 발길이 뜸한 농기구와 생활용품을 파는 만물상전이 나온다.

 

가게 한 켠에서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은 졸고 있고, 무료한 표정으로 신문을 뒤적이는 가게 아저씨는 지나가는 기자와 눈길이 마주치자 “뭐 사시게?” 하며 반기신다.

 

레이디퍼스트의 상징 ‘송금상회’

 

때는 이때다 싶어 가게에 들어서며 사장님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쳐나갔다.

송금상회,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만물상회다. 낫, 삽, 갈퀴, 주걱, 대바구니, 대빗자루, 방빗자루... 겨울이다 보니 눈치우기 용품이 전진배치 돼 있다.

 

“송금상회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지으신 거예요?”

 

“우리 마누라 이름이 송가여, 송유두. 나는 김가고 김성학. 그래서 마누라 성을 앞에 넣고 내 성을 뒤에 넣어 이름을 지었지?”

 

“사모님을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아니면, 공처가시던가...”

 

“공처가면 어때? 우리 마누라 없으면 나도 없는 거지. 꽃다운 나이에 나한테 시집 와서 고생 엄청 많이 했어.”

 

나주목사고을시장 오일장동에 송금상회가 있는데 송금상회 김성학(77·나주시 중앙동)사장은 이렇게 부부금슬을 자랑하셨다.

 

 

이 장 저 장 리어카장사로 기반 닦아

 

결혼 전부터 성북오일장에서 농기구며 생활잡화를 팔아온 김성학 사장은 나이 서른에 부인 송유두 씨와 결혼하면서 함께 일을 하게 됐다.

 

송유두 할머니는 “우리 고생했던 얘기를 말로 하자면 밤을 새도 다 못할 것이고, 글로 쓰자면 책 한 권을 내고도 남을 것이네”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인터뷰며, 사진 찍는 것을 마다하신다.

 

가장 보람 있던 때는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김성학 사장이 “우리가 아들만 둘인디, 둘 다 건강하게 잘 커서 대학 등록금 대 줄 때가 젤로 뿌듯했다”고.

그렇다면 제일 가슴 아팠던 때는 언제였냐는 질문은 송유두 할머니가 받았다.

 

“영감 서른 살 때 우리가 결혼해서 장사를 따라 다녔는디, 리어카에 물건을 싣고 나주장, 영산포장, 남평장, 다시장을 다 다녔지. 큰애가 태어나니까 업고 다니다 둘째가 태어나니까 하나는 짐 실은 리어카에 태우고, 하나는 등에 업고, 그렇게 다녔어. 그때는 고생도 고생이지만 애들이 짠했지.”

 

남편이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뒤에서 아내가 밀고 가는 모습을 떠올리니 졸업식에서 불렀던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노랫말도 생각나고, 남편이 노래하니 아내가 따라 부른다는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012년 목사고을시장이 들어서면서 나주장에서 ‘한 장 보기’만 한다는 김성학 사장.

 

“이제는 농사짓는 사람도 없고, 다들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세상이다 보니까 눈 와도 눈 치울 써레가 필요할까, 대빗자루가 필요할까, 이 장사도 사양길에 접어들었어. 우리 부부 용돈벌이 삼아 나오는 것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살이에 50년 가까이 해 온 장사도 사양길이지만 김성학 사장은 이미 달관한 듯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공구, 농기구, 생활도구 일체

 

철지난 감나무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홍시감이 먹음직스럽지만, 손을 뻗어 딸 수가 없으니 말 그대로 그림위 떡이 아닌가.

 

예전처럼 대나무 끝부분을 잘라 작은 나뭇가지를 끼워 간짓대를 만들어 따던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이보다 저 좋은 간짓대 가위가 나왔다 하니 이름하여 고지가위다.

 

그러고 보니 송금상회 가게 곳곳에 못 보던 작대기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중학생 때 수학여행길에 불국사 입구에서 부모님 선물로 샀던 효자손이 지금도 팔리고 있다.

 

그 뿐인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대지 않고도 고객의 신발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신발정리집게, 옷가게와 세탁소에서 높은 진열대의 옷을 걸었다 내렸다 할 수 있는 갈고리작대기, 사다리에 오르지 않고도 손 쉽게 감, 밤 따위를 딸 수 있는 ‘길어져라, 짧아져라’ 길이 조절이 자유자재인 고지가위란다.

 

얼마전 어느 신문에서는 인간의 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늘렸다, 줄였다 자유자재로 작대기를 활용하는 인간을 ‘호모작대기쿠스’라는 말로 묘사했다.

 

그러고 보니 그 옛날 감, 밤을 따기 위해 사용하던 간짓대나,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차트를 펼쳐 보이며 짚어주던 지휘봉, 재해현장에 시찰 온 고위관리들 앞에서 현황판을 짚어가며 보고를 하던 그 막대기까지...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막대기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공구, 농기구상가 5곳 이웃사촌

 

목사고을시장에는 송금상회 말고도 공구, 농기구, 생활잡화를 파는 가게 5곳이 서로 이웃하며 장사를 하고 있다. 농번기철을 제외하고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손님들이지만 그래도 경쟁하기 보다는 서로 의좋게 상가를 이루고 있다.

 

손님들 발길이 뜸한 사이 주인장들끼리 도란도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겨울 한파 보다 더 한 경기한파를 이겨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TV, 인터넷만 켜도 쇼핑을 할 수 있고, 심지어 핸드폰으로도 물건을 사고파는 세상이 됐으니 시장은 말 그대로 옛 추억을 떠올리며 구경거리 삼아 나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직접 물건을 골라 요모조모 살펴보고, 물건값을 흥정할 수 있는 곳으로 이런 장터만한 곳이 있을까.

 

더구나 각종 크고 작은 공구와 농기구, 생활도구 일체를 한꺼번에 펼쳐놓고 파는 장터에서야 주인장이 부르는 게 값이 아니라, 손님들 호주머니 사정에 맞춰서 적당히 에누리도 할 수 있는 장터, 목사고을시장에서 누릴 수 있는 깨알 같은 재미가 아닐까 싶다.

 

◇ 낫, 삽, 갈퀴, 주걱, 대바구니, 대빗자루, 방빗자루까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만물상점 송금상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