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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나주 목사고을시장 사람들⑲ 나주죽물점 김황례 사장

by 호호^.^아줌마 2014. 12. 28.

기획연재…나주 목사고을시장 사람들⑲ 나주죽물점 김황례 사장

 

“영감이 짜 놓은 소쿠리 쓰겠다는 사람 있으면 고맙지”

 

나주죽물점 김황례 사장 “뻣뻣한 대나무도 내 손에 들어오면 낭창낭창해져”

전통죽물 보다 플라스틱 선호하는 추세지만 진가 아는 손님들 발길 이어져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지난 2012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들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시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온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지금이야 여름이고 겨울이고 전기밥솥이 있어서 따끈하게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아침에 밥을 해서 점심까지 먹어야 했는데 한여름에는 밥이 금방 쉬기 때문에 대소쿠리에 담아서 보관을 했지. 잘못해서 파리들이 들어가면 그냥 찬물에 한번 헹궈서 암시랑토 않게 먹었어.”

 

나주목사고을시장 오일장동에서 나주죽물점을 운영하는 김황례(69, 나주시 성북동)사장, 스물 둘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와서 죽물장사를 시작했다하니 줄잡아 50여년을 대나무와 인연을 맺어왔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김병국 옹은 나주 인근에서는 그 솜씨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죽물 빚는 솜씨가 섬세하고 세련됐다고 한다.

 

살아생전 만들어 놓은 죽물을 창고에 쌓아둘 수가 없어 지금도 시장에 내다팔고 있는데, 이미 색이 바라고 귀퉁이가 찌그러진 것도 있지만 죽물을 가치를 아는 손님들은 지금도 김병국 할아버지의 소쿠리와 키를 찾는다고.

 

 

나무로도 멋지고 제품으로도 멋진 대나무

 

예로부터 대나무는 나무 자체로는 곧고 강인한 줄기와 푸르름으로 절개와 지조를 으뜸으로 여기던 사대부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사군자 중에서도 제일로 여겨졌다. 또 그 모습이 아름다워 시와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이 뿐인가? 살림집에서는 대나무를 이용한 공예품이 실생활에 많이 이용돼 이래저래 대나무는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과거 나주오일장 죽물전에서는 바구니에서 소쿠리, 참빗, 삿갓, 발, 자리 등 다양하고 많은 죽물이 거래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번성하던 죽물이 요즘은 중국산과 플라스틱 제품 등으로 인해 많이 위축된 상태에서 실제로 많은 죽물가게에서는 베트남이나 중국산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나무로 만든 공예품 또한 쉽고 값싸게 만들다보니 본드나 비닐끈, 니스칠 등으로 모양새는 더 좋아졌지만 옛 죽공예품에서 느껴졌던 정겨움은 많이 지워진 듯하다.

 

김황례 사장은 “요즘 나오는 플라스틱 그릇이나 바구니가 가볍고 편하기야 하겠지. 그래도 대나무제품만 하겠어? 우리 영감 손에서는 짱짱한 대나무들도 금방 낭창낭창 해졌다.”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여름 유용했던 대바구니의 추억

 

대나무로 만든 제품 하면 한여름 대소쿠리에 담아 부엌 기둥 위에 매달아 놓았던 보리밥 대바구니를 떠올리게 된다.

 

잘못 했다가는 파리란 놈들이 어느 틈바구니로 들어갔는지 소쿠리 안에서 와글바글 파티를 하던 것을, 기겁해서 밥 안 먹겠노라 떼를 쓰면 엄마는 우물에서 막 길러온 냉수에 보리밥 한 덩이를 말아주며 “암시랑토 않은께 묵어라” 하던 추억.

 

그 뿐인가. 동네 어른들이 개천에서 대나무 통발에 된장주머니를 만들어 매달아 담가 놓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새우며, 피라미,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수대로 몰려들어 즉석에서 매운탕을 끓여먹고 천렵을 즐기던 유용한 도구도 대나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나무를 손으로 일일이 쪼개 실을 뽑아 바구니를 만들던 것이 비생산적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재료값과 공을 생각하면 죽물은 기술이 아니라 공예, 예술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 싶다.

 

 

끈기와 정성으로 만드는 죽물

 

김황례 사장으로부터 죽물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대바구니 짜기에서 젤로 중요한 건 실뽑기여. 1.5mm씩 손으로 일일이 쪼개는데, 한 대에서 120개 정도가 나오지. 그걸 날실과 씨실로 삼아서 엮는 거여. 아무리 대쪽같이 꼿꼿한 놈들이라도 내 손을 거치게 되면 낭창낭창 해져서 무엇이든 만들 수가 있었지.”

 

이렇게 만들어진 대나무제품은 단단하면서도 매끄럽고 부드러운 대바구니는 무얼 담아도 모양새가 있었고 대나무 특유의 향이 담긴 음식의 청량감을 더해주기도 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대나무제품이 시세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제를 앞두고 소쿠리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대부분 일회용으로 한번 쓰고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을 찾는다.

 

간혹 김병국 할아버지가 만든 소쿠리를 찾는 손님들이 이지만 이런 경우 주인장이 물건값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이 얼마면 좋겠다 흥정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김황례 할머니는 죽물전에서 곡식도 팔고, 말린 나물도 판다.

 

요즘은 김장철을 맞아 절인 배추를 건져 놓은 원형바구니를 찾는 손님과 젓국을 끓일 주걱을 찾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김장철이 지나면 한겨울 죽물은 잠잠해지고 내년 봄을 기약하게 될 것이다.

 

문득 문성해 시인 ‘대바구니들’ 이라는 시를 떠올린다.

 

도심의 한복판에서 대바구니를 만났습니다

고집 센 장인이 만든 것처럼 결이 참 고왔습니다

저 위에서는 고사리든 생선이든 모든 것들이

다 잘 마를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어머니가 대바구니들을 거둬가지고

장독대에서 내려오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손으로 무쳐내시던 호박이며 무말랭이들이 유난히도 맛난 것은

저 대바구니의 공도 들어가 있었던 게지요

저 위에서는 꼭 무엇을 얹지 않고서도

햇살이든 바람이든 잘 노닐다 갈 것 같습니다.

 

 

김황례 할머니가 팔고 있는 대소쿠리, 대바구니에서는 정말 호박오가리며 고등어, 조기가 꼬들꼬들 잘 마를 것 같다.

 

 

◇ 지금은 고인이 된 김병국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대소쿠리며 죽물을 찾아 지금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주죽물점. 김장철을 맞아 물빠짐이 좋은 대바구니를 찾는 손님들이 반갑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