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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데스크 칼럼…낮은 데로 임하소서!

by 호호^.^아줌마 2009. 1. 12.

데스크 칼럼…낮은 데로 임하소서!

 

김양순 편집국장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대학시절 동아리활동으로 김지하 시인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공연한 적이 있다. 90년대 후반에 붙여진 이름이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386세대’였던 우리는 기득권 세력과 소외받는 자들의 대립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금관의 예수’에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소외받는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그들은 바로 신부, 배때기, 순경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일해야 할 신부는 돈의 노예가 되어 신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득권의 대변자가 되어버렸다.

배때기는 부귀와 영예를 가졌으면서 가난한자를 위해 베풀 줄 모르고, 저 혼자 천국에 가려는 자로 예수에 머리에 금관을 씌운 장본인이다.

순경은 작은 권력이지만 그 권력을 이용해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인물이다.

이들이 기득권의 대표자들이라면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소외받는 자들을 나타낸다. 먼저 수녀는 목사와 대립하여 소외받는 자들의 입장에 서는 종교인이고, 문둥이는 비록 갖은 것은 없으나 조금이라도 생기면 자신과 같은 소외받은 자들에게 베푸는 긍정적인 인물이며 거지는 기득권에 대해 불만을 가졌으며 또한 믿음까지 잃어버린 인물이다.

이렇게 희곡 ‘금관의 예수’는 뚜렷한 선과 악, 기득권과 소외계층 대립을 통해 종교의 세속화, 약육강식, 물질 중심주의와 같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2009년 새해가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지금 이 시대에도 ‘금관의 예수’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연말 중년의 한 여성이 다가와 잠깐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내용인즉슨 얼마 전 한 여성단체에서 불우이웃을 돕자며 김장을 했는데, 공무원, 시의원들에게는 김치에 석화를 넣어서 버무려주고, 불우이웃들에게 주는 김치에는 넣지 않더라는 것이다.

더구나 한 의원이 15통이나 되는 김치를 가져가는 것을 봤는데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면 “의원이 그러믄 쓰겄습니까?” 그러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기사로 다루기도 그렇고, 당사자들에게 왜 그랬냐고 따질 수도 없는 부분이고 난처한 입장으로 해를 넘겼는데, 바로 며칠 전 그 여성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그때 그 일에 대해서 알아봤느냐는 확인전화였다.

난감했다. 물론 확인은 했다. 그 여성단체 회장은 “당시 김장에 참여한 봉사자들의 점심용으로 석화 3천원어치 사서 버무려먹었던 것인데 그게 문제가 되느냐?”는 반문이었으며, 15통이나 되는 김치를 가져갔다는 의원은 “어려운 분들에게 모두 전달을 했다”고 밝혔다.

옛 속담에 ‘하찮은 호박나물에 눈물난다“고 하지 않던가? 공무원이 먹는 김치든, 의원이 먹는 김치든, 불우이웃이 먹는 김치든 같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그 여성분의 항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

바로 우리 사회가 권력이든 재산이든 많이 가진 자에게는 관대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는 더 야박한 현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행정기관에서 민원처리를 하는 것을 보더라도 일반 시민이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서 민원을 해결하려고 하면 어찌나 절차를 따지고 원칙을 따지는지, 그래서 어지간하면 의원을 대동하고 기자를 대동하고, 심지어는 시장실을 통해서 민원을 해결하려는 경우가 현실이다.

새해에는 평범한 사람들, 오히려 소외되고 딱한 사람들, 우리사회의 마이너리티, 약자들을 배려하는 그런 풍토가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버스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 아무리 주차장이 만원이어도 교통약자를 위해 장애인석은 침범하지 않는 배려... 이런 기본만이라도 지키는 한해가 되자. 바로 나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