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근 칼럼
설, 그 깊고 오묘한 의미
동신대학교 소방행정학과 교수 오종근
음력 정월은 한 해의 첫 달을 일컫는 말로, 정(正)에는 첫째 번 과 세수(歲首)의 뜻이 있다. 정월 초하루를 원단(元旦), 설 또는 설날이라 하며, 대보름날까지 설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갖가지 세시풍속이 행해진다. 이는 제액초복(除厄招福)하여 풍요와 건강, 안녕을 비는 제의적 행사이며, 세시의례 또는 세시제의라고도 한다. 또 역서에 의해 치러지는 민속이라 하여 역서제의(曆書祭儀)라고도 한다.
설 기간에 각종 신년제를 행하는 것은 이 때가 농한기라는 점도 있겠지만 근원적으로 신성기간(神聖期間)이기 때문이다. 묵은 해가 끝나고 새 해로 넘어오는 연초는 확실한 시작 이전에 있는 공백기로, 새 질서가 잡히기 이전의 혼돈(chaos)상태이다. 신화학과 종교학에서, 카오스는 신성(神聖)으로 상징되고, 이와 대칭을 이루는 것이 코스모스(cosmos)로서, 세속(世俗)을 의미한다. 섣달 그믐날에서 정초 사이는 카오스 상황이 계속되어 신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 각종 신년 제의를 지냄으로써 신에게 소망사항을 기원했던 것이다.
또한 새해 첫날인 설날에는 차례(茶禮)와 성묘(省墓)를 한다. 어른께는 세배(歲拜)를 하고, 덕담(德談)을 나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공동의 수호신인 산신과 서낭신, 당신, 용왕신 등에 제사지내며, 풍요와 무재해를 기원한다. 마을의 협동이 요구되던 농경에 있어, 공동의 신을 섬기고 공동으로 제의를 거행한다는 것은 협동과 상부상조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동제에는 모든 동민이 협동하여 제사비용을 마련하였다. 함께 금기를 지키고 참여하여 대동제, 대동굿, 대동계를 했다. 이는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행사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의례 중 관혼상제는 생노병사 과정에서 거치는 통과의례로 중국 주자(朱子)학설에 따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중심으로 실행되었다. 이 기본 틀에 따라 신위를 모신 곳은 북쪽이고 음식도 陰陽에 따라 배열한다. 제사나 차례법은 가정이나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선조들은 제사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무언(無言)의 가르침으로 후손들을 일깨웠다.
우선 차례상의 위치는 북쪽이 원칙이지만 방위에 관계없이 지내기 편한 곳에 차리는데 ‘예절의 동서남북’이라고 해 지방(神位)을 모신 곳이 북쪽이 되며 제주(祭主)가 차례상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이 동쪽이 된다. 동양철학의 바탕이 되는 음양론에 근거해 진설할 때 밥과 국을 올릴 경우 밥(서쪽)과 국(동쪽)을 반대로 놓는다. 산사람은 양이고, 죽은 사람은 음으로 보고 밥과 국그릇을 반대로 놓은 것이다.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어동육서(魚東肉西: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등도 같은 맥락이다. 차례상에는 故人이 생전에 잡수셨던 것을 위주로 싱싱하고 깨끗한 것을 올리지만 생전에 즐겨 드시던 것과 함께 감·대추·밤이라는 기본적인 제수(祭需)를 빠뜨려선 안된다. 차례상의 대추(棗),밤(栗),감(柿)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미디어로서 후손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대추는 후손을 상징해 有子生女하는 多産과 多福을 뜻한다. 대추나무는 꽃이 핀 줄기에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가 맺는 대추처럼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자식하나를 낳고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결혼식 폐백 때 집안 어르신들이 신부 치마에 던져주는 것이 바로 대추인 것도 그런 의미다.
둘째, 밤은 조상 즉 자신의 근본인 선조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대부분 식물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싹을 틔운 씨앗은 흙이 되고 말지만 밤만은 땅 속에 들어갔던 최초의 씨밤인 밤톨이 아들격인 나무로 자라 손자뻘인 열매가 맺을 때부터 썩는다고 한다. 이는 나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후손이 몇 백 대(代)를 내려간다고 해도 조상은 언제나 나와 영적(靈的)으로 연결된 채 함께 있다는 상징이다. 위패(位牌)나 신주(神主)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데 밤나무가 향기 좋거나 깎기가 편해서가 아니라 이런 상징성 때문이다. 또한 밤은 3년 만에 열매가 열리고, 세 번 이식하면 좋은 밤이 되고, 세 번 껍질을 벗겨야 먹을 수 있다. 밤 율(栗)자를 파자하면 방위로 서쪽(西)을 상징한다.
셋째, 감은 교육을 상징한다. 감씨를 심으면 감이 아닌 대추만한 크기의 고욤이 열린다. 그래서 2-3년생 감나무 묘목의 줄기를 대각선으로 생살을 찢고 키우고자 하는 감나무의 接을 붙이듯 인간의 기본을 교육해야한다는 뜻이다. 자고로 사람이 태어났다고 모두 사람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배울 때는 생살을 찢는 아픔이 있다는 의미이다.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첫 장 첫줄에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학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고 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 는 데에는 생가지를 째서 접붙일 때처럼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을 겪으며 선인(先人)의 예지를 이어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의 인격체로 설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조들의 기제사(忌祭祀)를 지내는 우리의 설날 차례상에는 이런 깊은 뜻이 담겨 있는데도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고 있으며 이와 함께 공동체의식·효도정신 등을 배울 기회마저도 간소화에 밀려 점점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것이 설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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