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하 시인의 < 오랜 기다림의 꽃>시집에 대한 단상
시인 황도제
어줍지 않은 가늠자로 대 선배이며 형님(?)인 최은하 시인의 시집 <오랜 기다림의 꽃> 에 대하여 길다는 둥 짧다는 둥 나의 속내를 내 보인다는 것은 풋바심과 같아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시집을 손에 들고 있음인데- - - - -
구두를 사고 싶어하는 손님을 따라 제화점으로 들어가 보자.
손님이 이것 저것 눈 여겨 보다가 괜찮다 싶은 구두 하나를 골라 발을 넣어 보고 작은 듯하여 벗으면 점원은 재빨리
"세련된 것을 잘 골랐습니다. 이런 신발은 헐거워서 덜거덕 거리는 것보다는 꽉 끼어야 제 모양이 납니다. 또 가죽이 좋아서 신다보면 발에 맞춰 알맞게 늘어나 곧 편안해집니다."
라고 할 것이다.
만약 손님이 조금 큰 신발을 고르면
"아주 멋진 구두입니다. 이런 신발은 꽉 끼면 발가락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조금 낙낙해야지만 발도 편하고 구두의 모양과 품위가 그대로 살아납니다. 또 이 구두는 신축성이 좋아서 곧 발에 맞추어 줄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말 할 것이다.
만약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잘 맞는 것을 고르면
"아주 잘 골랐습니다. 참 잘 어울립니다. 이 가죽은 비를 맞아도 줄어들거나 늘어나지도 않습니다. 싫증이 나거나 닳아서 버릴 때까지 편하고 줄거운 마음으로 신을 수 있습니다."
하고 자신 만만하게 말 할 것이다.
다음은 백화점의 넥타이 판매장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대체로 손님이 만지거나 눈 여겨 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권하도록 교육을 받는데 가령 청년이 화려한 넥타이에 관심을 두면
"젊은신 분은 그 젊음 자체가 멋진 모델이기 때문에 이런 화려한 칼라일수록 인물이 돋보이게 되며 인생을 도전적으로 살게 됩니다."
라고 권할 것이다.
노년의 신사가 색상과 디자인이 무난한 넥타이를 고르면
"손님 눈이 높으십니다. 너무 화려하면 무게가 없어 보이고 너무 어두우면 답답하고 힘들어 보입니다. 이 색상과 디자인이야말로 인격과 교양을 기품 있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시에 대한 평자의 접근도 이 점원의 궤변(?)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독자가 스스로 자기 눈에 맞는 시를 골라 마음에 지니기 시작했다면 그 자신이 선택한 자신의 안목에 도취하여 즐거워하고 있거나 또는 시를 나름대로 분석하여 이미 자기의 영양소로 삼고 있을 테니 평자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평자가 따라 붙어 미주알 고주알 설명하면 오히려 더 불편해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손님이 선뜻 구두나 넥타이를 고르지 못해 망설일 때 점원의 현란한 수식의 안내를 받아 구두나 넥타이를 즐거운 기분으로 산다면 반드시 속이거나 속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란 비유와 압축으로 무장되어 있는 데다 행간에 많은 의미를 숨겨 놓고 있기 때문에 평자가 비유의 원관념과 압축되어 있는 파일을 열어 보이고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들춰내어 이해를 도모시켜 마음에 기쁨을 준다면 이것 또한 독자를 속였다고 비난 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다음 시는 그런 입장에서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은
길을 묻지 않고
손 치켜 들어 제 길을 내어가며
그리운 한 가닥 천상의 꿈
지금은 그 꿈의 모습을 내 보인다
바람 부는 날이면
바람의 몸짓으로 소리 지르고
구름으로 떠 올랐다가 흘러내려
땅 위 가장 낮은 자리
지맥으로부터 길을 찾아
바다에 이르고
서린 이야기로 넘실댄다.
어디, 무슨 말이란 게 제대로 오고 간다더냐
잠깐 모습만 비춰냈다가
그 어떤 형태로도 지었다가
이 날까지 목숨이란 목숨을 부지해 살렸다가
예사로이 죽음까지도 도와내다가
다시 살려내는 손길의 힘살
그 숨결 안에서 바람과 더불어
음악의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운다. 물은
살아 있는 길이요. 묵언이다.
위의 시 <물은>은 리듬이나 운율의 음악성이나 시각적인 면에 치중한 회화성의 시는 아니다. 대신 연륜과 체험에서 건져 올린 삶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둠으로써 서정시의 본령인 조직의 긴밀성을 통한 집약성과 암시성을 적절히 사용하여 체험의 연속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낸 개념성이 강한 시인 것이다. 따라서 '경험의 독백적 표현' 또는 '엿들어지는 독백' 으로 불리는 자기 표현을 아주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음 또한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물은>이라는 이 시를 다시 일독해 보면,
시종일관 물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물은 살아 있는 길이요, 묵언이다' 라는 구절에선 물의 정의가 잘 나타나 있는데. 물론 논리학에서 다루는 '피정의항=정의항'의 형식은 아니지만 시각을 바꾸면 '지정-확인'의 진술 형태로 의미를 표출하고 있는 시적 정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물에 관한 시적 정의를 왜 시 끝에다가 장치했을까?
그것은 '목숨이란 목숨을 부지해 살렸다가/ 예사로이 죽음까지도 도와내다가/ 다시 살려내는 손길의 힘살/ 그 숨결 안에서 바람과 더불어/ 음악의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운다.' 라는 구절과 관련있는 것으로써 물의 기능이며 속성 더 나아가서는 물의 자세라고 할 수 있는 물의 본능적 행위를 명료하게 드러내어 독자에게 강한 메시지를 환기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물은>이라는 이 시는 물이 어떠함을 알려주고자 하는 1차원적 의미를 벗어나 인간들이 보고 따라야 할 이 세상의 가장 분명한 대상을 확실하게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최은하 시인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것이다.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인 것처럼 툭 내던지는 삶의 자세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노장의 사상이 압축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나면 사유의 폭이 꽤나 광대무변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파고 드는 것이다. <물은>이라는 시 또한 노장의 사상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노장의 사상의 진수를 터득하여 실행토록 하는데 그 깊은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최은하 시인은 노장의 사상을 시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나온 삶에서 느낀 인간의 가치적 측면을 최대 공약수로 집약하다 보니 자연히 노장의 사상이 녹아 흐르게 된 것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께서는 노장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긴 시간 책을 보면서 정독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이 시가 대신하고 있음에 참으로 고마워 하지 않을 수 없다.
짤막한 시를 통하여 노장사상의 진수를 맛본다는 점, 시인의 힘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노장사상의 핵심어는 도(道)와 무위(無爲)와 소요(逍遙)이다.
이 세 개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묶어서 노장의 사상을 가장 짧게 정리해 보면
"우리 스스로 대 자연 속에서 발버둥 치지 않으며 살아 가는 것이다"
로 표현해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달리 연결해 보면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大 報怨以德(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대소다대 보원이덕: 행하지 않음을 행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었인가로 하고 아무 맛도 없는 것을 맛으로 하며 소(小)를 대(大)로 하고 소(小)를 다(多)로 하며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속 뜻은 대국적인 입장에서 인생을 보며 관점을 바꿔서 살아 갈 때 모든 고통과 모든 무의미는 사라져서 즐거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 되는 것이다.
노장의 사상은 이렇게 관점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점의 전환은 삶을 충족시키며 인생의 가치를 확립시켜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건 분명하다. 그러나 언어 이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은 관점을 전환하였다 하여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형이하학적 모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단어로 아래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上善若水水善利萬物不爭(상선약수수선이만물부쟁: 가장 으뜸 가는 선은 물과 같으며 물은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인간들이 추구해야할 대상이 왜 물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최은하 시인은 이 물을 인간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기에 이렇게 그려낸 것이다.
인생이란, 소리 없이 흘러내리며 모든 식물들을 살리고 고기들에게 삶의 터를 제공하면서 흙을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자신을 하늘에 맡긴 채 자연 대로 살아 가는 물과 같은 것,
바로 이 물의 삶이, 도(道)의 깨달음이요, 이런 도(道)의 깨달음이 무위(無爲)의 원칙대로 살아 감을 뜻하는 것이며 발버둥 치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소요(逍遙)인 것이다.
이 소요의 상태로 참다운 삶을 맛보면 지락(至樂)에 이르는 것이다.
<물은>이라는 시 는 이 내용, 이 말 이 깊은 뜻을 한 문장으로 말해버린 것이다.
'물'이라는 한 단어를 통하여 '물'이라는 단어 속에 몽땅 담아서 시로 나타낸 것이다. 명령체가 아닌 그렇다고 소망 기원체도 아닌 하나의 명제처럼 <음악의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운다>로 제시함으로써 본질을 확인케 하고 <물은 살아 있는 길이요, 묵언이다>로 물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정립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인간이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물'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단순화 시켜 시로 표현한 최은하 시인의 삶의 메시지는 높은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시집 <오랜 기다림의 꽃> 중 제일 두드러진 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시 말고는 다른 시는 언급할 것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썩 마음에 드는 시가 왜 없겠는가? <사계(四季)> 같은 작품은 인간의 보편적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린 가슴 뭉클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또 <오랜 기다림>같은 작품도 인간의 회귀 속성의 기다림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써 일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지 않은 것은 평자가 나서서 거들지 않아도 독자 제위께서 벌써 맛과 향기에 취해 있는 것 같아서 거두절미한 것이다. 괜히 나서서 그 맛을 오히려 역겹게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인 셈이다.
대 선배이시며 형님인 최은하 시인님! 더 더 좋은 시로 후학들의 눈을 줄겁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의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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