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남도문학의 뿌리를 찾아서 ‘백호 임제 시의 재조명’
“저승에 계신 영웅이여, 한(恨)을 풀으소서”
시대를 풍미한 진정한 풍류남아 임제 시혼(詩魂) 되살려야
올해 ‘나주문학 집중의 해’를 맞아 갖가지 문학행사가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일 나주문화예술회관에서는 백호 임제의 시를 재조명하는 뜻깊은 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전라남도문인협회(회장 조수웅)와 나주문인협회(회장 김상섭)가 공동주최한 이날 행사는 백호 임제의 문학세계를 놓고 전문패널들이 다각적인 방법으로 해부하고 비춰보는 의미있는 자리가 됐다.패널들의 발표내용을 중심으로 백호 임제의 시 세계를 재조명해본다. / 편집자주
패강가(浿江歌)를 토대로 한 기행시 고찰
…송수권(시인, 순천대 명예교수)
백호 임제는 명종 4년(1549)에 태어나 선조 20년(1587), 39세의 짧은 나이로 운명하기까지 격치(格致)에 막힘이 없었고 탈속의 경지를 넘어 방외(方外)에서 놀다간 참으로 보기 드문 반지성의 아웃사이더였다.
해학과 풍자로 일관된 인물로 28세에 과거에 올라 예조정랑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꿰뚫기는 어렵지만 동서 붕당의 정치색에 물들지 않고 사해를 관통하며 자주정신을 실천한 역사상 유일한 단독자라 할 것이다. 그는 호남 3쾌걸 중 같은 나주 출신인 임형수(林亨秀)와 더불어 반지성파의 레지스탕스에 해당한다.
임형수(1504~1547)가 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으로 아들 구를 불러놓고 ‘글을 배우되 과거는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던 것처럼 그 또한 운명하면서 ‘사해 모든 나라가 제각기 황제라고 칭하는 마당에 유독 우리만이 자주독립을 못하고 사대에 얽매여 있으니 내가 살아 무엇을 할 것이며 죽는다 한들 무엇이 서러우랴, 내가 죽더라도 곡은 하지 말라’고 했다.
황매천(黃梅泉)은 백호의 고향인 회진을 지나면서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九泉莫抱英雄恨
今日朝廷帝座高
저승에 계신 영웅이여, 한을 풀으소서.
오늘은 독립국가로 황제가 높이 계십니다.
바로 이 시구가 지금 계획 중인 백호의 기념관 앞에 새겨질 시다.
백호의 패강가십수(浿江歌十首) 중 둘째 수를 읊어보자.
東明異說屬漁樵 麟馬朝天事寂寥
野草欲纏文武井 沙禽飛上白雲橋
동명왕 전설은 어부와 초동들에게서 아직도 전해오는데
인마가 날았던 그 시절의 하늘은 오늘따라 더없이 적막하기만하네.
들풀은 엉켜서 문무정을 덮으려 하고
물새는 날아 백운교 위에 치솟네.
그는 평생 동안 옥퉁소와 거문고, 칼(보검)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옥퉁소와 거문고는 선비의 넉넉함을, 그리고 칼은 기개를 상징했다. 그의 성격 가운데 이 넉넉함의 선비정신은 큰 아버지인 풍암(楓岩 ) 임복(林復)에게서 영향 받은 바이며 칼의 기개는 5도절도사를 지낸 부친(청백리) 진(晉 )에게서 물려받은 성격으로 짐작된다.
여기에다 그가 사랑한 말 ‘적토마’까지 곁들여 천하를 주유했으니 그이 풍토가 가히 얼마나 컸음을 알 수 있겠다.
그는 무엇보다 ‘붕당의 화가 역란(逆亂)보다 크다’고 그 망국병을 ‘화사(花史)’에서 꼬집는가 하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에선 과감한 선비들의 행동력 결여로 역사의 무기력(無氣力)을 통탄하고 조카 단종을 죽인 계유정란에 대한 세조의 불의를 패륜아에 비유했다. 그 의기는 참으로 서릿발 같다 할 것이다.
임제시에 나타난 공간의식 ‘길 위의 집’
…염창권(시인, 광주교대 교수)
백호 임제는 조선조를 통틀어 호쾌한 풍류남으로 통한다. 여기서 호쾌한 대장부라는 것은 일찍이 세속의 이욕과 권세에 아부하여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고 자유인으로 떠돌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풍류남이라는 것은 세상의 풍류만이 삶의 거처나 지향점의 역할을 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에 거처를 두고 안주하기보다는 풍류남으로서 떠돌기를 좋아했으며, 닿아 머무르는 곳에 풍류와 운치가 있기를 바랐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우선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아래로 동화 땅을 내려다보니
아득히 다만 누런 먼지 뿐
下視東華土
茫然但黃埃
임제는 28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지제교(知製敎) 재임 중에 당쟁을 개탄하고 치사(致仕)한 후 승경(勝景)을 찾아다니며 일생을 마쳤다는 전기적 사실로 미루어보아,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장부의 시선에는 진세의 세상사가 황사 먼지에 묻힌 것처럼 아득하고 답답하게 보였을 것이다.
임제의 다음 시조에서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서는 남성의 호방한 기개가 잘 나타나 있다.
北天이 맑다커늘 우장 업시 길을 나니
산의난눈이오고 들에난 챤비온다
오날은 챤비 마자시니 얼어잘가 하노라
그는 외공간의 길에서 눈과 찬비를 맞으며, 내밀한 거주지를 그리게 된다.
외공간의 고독과 추위가 가중될수록 집의 보호성은 증가한다. 특히 “찬비”(寒雨), “얼어가”(男女交合) 등의
중의법을 써서 내밀한 성적 공간을 지향한다.
이에 화답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우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일 얼어 잘이
鴛鴦枕 翡翠衾을 어듸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노라
임제시에 나타난 길 위의 나그네로서의 여정과 풍류적 활동은 그가 남성적 젠더 공간을 소유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정착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삶의 양상은 집을 중심으로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조에는 사회가 규범화되면서 남녀의 젠더 공간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그러므로 시에서 화자가 여성이냐 또는 남성이냐에 따라 시의 공간 소유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남성은 길을 소유할 수 있었음에 비하여, 여성은 길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것은 생활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성의 집은 남성의 길가는 양상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의 여부가 좌우된다.
임제시에 나타난 거주 공간의 경우, ‘떠돎’과 등가인 ‘길 위에서 길 찾기’이자, 일시적인 거처인 ‘길 위의 집’에서의 풍류적인 세계의 펼침과 이별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풍자속의 서정성 회복하기
…김양호(시인, 한영대학 유아교육과 교수)
백호 임제는 중용사상과 심성 제일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명분론을 중시하는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이 공존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인간관은 인내천 사상. 민족관은 진취적 민족주의로서 애국애족의 사상가였다.
임제는 스승 성운의 영향을 받아 당시의 혼탁한 정치 사회에서 성리학적 자주사상과 절의사상을 신념화하여 선비적 본분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그는 현실과 타협하여 명리를 꾀하는 대신 절조와 의리를 존중하며 청렴결백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시인이다. 임제를 논할 때 항상 인용되는 시가 다음의 시다.
새벽에 일어나 향 피우고 정좌하여
중용을 수차례 읽어본다.
장구의 비루함을 스스로 알아
비로소 성령의 참됨을 깨친다.
달그림자 연못 가운데 고요하게 비치고
매화는 차디찬 눈 속에서 봄을 맞이하네.
보고 또 볼수록 삶의 의욕 차오르니
모든 것이 오로지 내 마음에 달려있네.
39세로 요절한 조선 중기 천재 시인 풍류객 백호 임제의 시와 사람에 관한 일화는 그의 짧은 삶만큼이나 짧고 굵게 길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의 시대는 사화들이 난무 (1489년 임제 시조는 주제의식을 무시하고 철저히 자신의 진솔한 정서를 고도의 문학적 수사를 가미하여 높은 차원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당시 사대부의 시조와는 달리 충의와 안빈낙도라는 규범적인 윤리성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정서를 가식 없이 발휘하여 문학의 순수 서정성을 확보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운명이 다함을 알고 죽음 인식의 만시를 짓고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는 이러한 만시를 통하여 시의 감각성과 생동감 그리고 솔직 담백하게 감정 표출의 서정적 극치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물곡비(勿哭碑)를 통해 본 백호사상 엿보기
…나종입(시인, 소설가, 문학박사)
임제의 기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선이 굵고 색깔이 분명했으니 그는 타고난 풍류가객이었다.
호탕하고 기발한 그의 시는 항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의 대문호 신흠은「백호문집」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가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컫었고 또 시에 있어서는 그에게 90리나 훨씬 뒤떨어져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 변에 통개 베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왜라 소리에 잠 못 들어 하노라
그의 사상은 호방하면서도 명쾌하고 드높은 기상을 지녔다.
나라의 자주성 회복과 강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세계를 호령하고 싶은 심정이 담긴 그의 시가 묘 아래 시비에 적혀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임제의 우언소설들은 봉건적 지배체제의 억압적 본질과 사대부적 이상의 좌절과 성리학적 이념의 회의 속에 맞이하는 작가의 내적 갈등과 불안, 우수와 고뇌를 상징적으로 형상하고 있다.
이는『금오신화』이래로 문인 창작소설의 계맥을 이으며 17세기 이후 가전체와 몽유록계 소설을 유행시켰을 뿐 아니라, 탈이데올로기적·비판적 사상이나 작가의식 면에서도 선구적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후대의 연암 소설이 우의적 구도·표현과 함께 신랄한 어희와 패러디를 통해 작가의 예리한 비판정신을 구현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임제의 우언소설 작품들은 조선 전기와 후기 소설사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제는 현실적인 대안을 상실함으로써 성리학적 이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임제 자신은 이념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분명한 것은 성리학적 이념이 현실에서 곧 허구임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는 나름대로 대안이 없는 현실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시와 소설이 지니는 중요한 문학사적 가치는 이처럼 당대 문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보적 개성 내지 독창성에 있는 것이다.
양반사대부의 허울을 벗어 던지는 파격적인 행적과 호방한 기품을 보였던 임제였지만 요즈음은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가끔씩 고요함을 깰 뿐이어서 아쉬움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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