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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이야기

나주 도시재생의 열쇠를 찾아 떠난 전주시 한옥마을

by 호호^.^아줌마 2011. 7. 5.

 

기획연재…나주를 바꿔라 ‘확’ 바꿔라⑦

 

◇ 현대문명과 전통한옥이 어우러진 전주 한옥마을에서 나주 원도심 도시재생의 열쇠를 찾아보자.


 

나주 도시재생의 열쇠를 찾아 떠난 전주시 한옥마을

 

도시재생의 핵심은 원주민 주거권과 생활권 보장에 있어


성형은 미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많은 도시들이 도시재생을 통해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나주도 빛가람혁신도시가 완성되면 최첨단 신도시와 쇠락한 구도심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 문화적인 괴리감 이상으로 심리적인 박탈감이 지역사회의 큰 저해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신구도심 간의 격차를 줄이고, 원도심 주민들의 정주의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현재 말잔치에서 머물고 있는 원도심 활성화 방안이 좀 더 속도감 있게 추진될 필요가 있다.

나주시가 도시재생사업이라는 맥락으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사업들이 과연 어떻게 추진되고, 어떤 미래를 지향할 것인가, 이번 호에서는 전주시 한옥마을을 돌아보며 나주 원도심 재생의 명암(明暗)을 살펴본다. / 편집자 주

 

 


전라도 역사의 근간 전주와 나주


전주는 나주와 함께 전라도의 근원이 된 고장이다. 하지만 행정의 중심지가 전주와 광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전주, 무안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행정적인 의미의 도청 소재지는 의미가 없어졌다. 다만, 그런 역사와 문화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을 뿐...

 

전주 시내를 한 바퀴 돌다 찾아간 곳이 전주 한옥마을이다. 경기전 입구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누리예술단이란다.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북쟁이(?)의 소리가 구성지다. 거의 진도 본토 수준이다. 전라도 소리에 남도와 북도의 경계가 있었던가? 다만 계파(유파)의 소리에 약간의 차이날 뿐이라고 나름 정리해본다.

 

 


도심 속에 오롯이 남아있는 한옥마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심 속에 잘 보존된 약 700여채의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을사조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란다.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반발한 전주민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서양풍의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전주한옥마을이 한국 전통문화의 수도를 자임하며 슬로시티 가입을 선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아시아 최초로 지난 2007년 12월 신안 증도와 완도 청산도, 담양 창평 삼지천 마을, 장흥 장평·유치가 슬로시티로 지정됐고, 경남 하동 악양면이 가입돼 모두 5개 지역이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전주시는 한(韓)스타일 콘텐츠 등 가장 한국적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을 국제적 관광명소로 브랜드화 하기 위해 슬로시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시대와 문명이 공존하는 한옥마을과 전동성당


전주 한옥마을 맞은편에 세워진 전동성당은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호남 전체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다. 영화 ‘약속’에서 전도연과 박신양이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 곳.

 

원래 전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풍남문의 밖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고산 윤선도 6대손)을 비롯하여 그의 외종형 권상연과 유항검 등 호남 지역의 많은 천주교 신자가 참수당한 순교한 자리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개항지가 아니었던 전주시에도 선교사가 들어왔으며, 1891년에는 전주성당 (현재의 전동성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다.

 

전동성당은 호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며,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성당을 착공한 1908년에는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본제국의 통감부가 전주읍성을 헐었기 때문에, 성당의 주춧돌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돌을 이용하였다.

 

또한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 또한 전주읍성의 성벽에서 나온 흙을 이용하여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직접 구워 사용하였다. 나머지 석재와 목재들은 각각 익산시 황등면의 채석장과 승암산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1908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1년에 최종 완공되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성지순례객으로부터 전동성당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에 전주읍성 주변에 신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산골인 대성리 등에 신자가 밀집해 있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한다.

 

따라서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됐다. 성당은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이후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돼 1931년에 완공돼 그 해 6월 18일  축성식을 가졌다. 1981년 9월 25일에 사적 제288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지난해 5월 대한민국의 일부 기독교 교회가 사회봉사보다는 외연적 성장에 치중하는 것에 분노한 20대 청년 2명이 건물 정문에 반 기독교적 낙서를 했다가 붙잡혔다는 안타까운 얘기도... 

 

 


깔끔한 현대도시 어울어진 도심


꽃길을 따라 거리를 걷는데 자연석으로 된 도로가 여유를 준다. 전봇대와 전선이 모두 지중화된 덕분인지 거리가 깔끔하다. 자연이든, 문명이든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거미줄 같은 전깃줄에 자유로운 공간이 드문데 하늘을 가리는 전봇줄 없는 풍경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가로수길을 아이를 무등 태워 거리를 활보하는 부녀(父女)가 눈에 띈다. 도심 한 가운데에서 누릴 수 있는 고도(古都)의 한적함에서 전통과 문명이 공존하는 전주의 가치를 새삼 느낀다.

 

추억의 뽑기게임에 거금 3천원을 날린 딸들. 한 번에 천원 걸고 뽑기를 하는데 피라미 수준의 붕어엿 한 개를 얻었다.

 

나주하면 곰탕이듯 전주 하면 비빔밥이다. 피자를 먹자는 아이들을 반 협박으로 구슬려 전동성당 앞에 있는 비빔밥집을 갔다. 바로 옆에서 공연이 한창이고, 서둘러 밥을 먹고 주변을 둘러볼 요량으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은 결과다.

 

그런데 건물 겉모양과는 달리 식당풍경이 전혀 전주 같지가 않다. 그냥 시골 자장면집 수준이다. 바깥전망이라도 보자 하는 마음에 2층으로 자리를 잡으려고 했더니 거긴 단체손님만 받는단다. 계단 오르내리기 귀찮다는 표정이다. 전주비빔밥, 비빔밥은 늘상 즐겨먹는 메뉴지만 전주에서는 처음이다. 8천원, 나주 보다는 2천원이나 비싸지만 그래도 본토의 맛을 즐겨보자. 하지만 꿈을 곧바로 깨졌다.

 

다 식어버린 시래기 된장국, 그 것도 그릇의 바닥만 겨우 채운 정도. 반찬, 배추김치 대여섯 가닥, 멸치와 가지나물, 또 다른 반찬 두세 자밤, 명색이 비빔밥인데 참기름, 고추장도 없이 멀건 밥을 내놓는다.

 

점심과 저녁의 중간 시간이라 손님이 뜸했지만 그래도 전주에 왔으니 비빔밥이나 먹자 하는 손님이 두 셋 더 왔다. 그런데 손님을 받아놓고 무슨 잡담들을 그렇게 하는지, 나오면서 언짢은 마음에 일부러 잘 먹었다는 인사를 안 하고 나오는데 ‘잘 가라’는 인사도 안 한다.

 

그렇게 좋은 목에서 식당을 운영하려면 종업원이나 주인장이 좀 더 전주사람다운 면모를 갖췄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서성문과 함께 복원될 예정이던 성벽이 당초 나주천에서 국도13호선까지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사업규모가 축소돼 나주천까지만 복원될 예정이다.

 

 

서성문(西城門), 흉물탈출 제 모습 찾아


다시 나주로 돌아와서 최근 모습을 드러낸 서성문을 올라가 봤다. 사업비 확보가 늦어지면서 3년이 넘도록 흉물처럼 방치돼오던 나주읍성 서성문(사적 제337호)이 드디어 복원공사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 8월 문화재전문건설업체인 삼일건설을 통해 복원된 서성문이 복원돼 주변 주택가와 나주향교 인근지역이 역사문화공간으로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됐다.

 

이번에 복원된 서성문은 전체 2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공포를 비롯한 건축양식은 동점문 양식을 토대로 하고, 성벽과 육축에 사용되는 돌은 국산화강암 원석을 사용해 전통방식대로 복원됐다.

 

이번 서성문 복원공사는 동점문에서 나주목관아, 나주향교로 이어지는 이른바 ‘천년 역사의 길’ 가꾸기를 통해 전통담장 설치와 전선지중화 등의 사업도 함께 병행한다는 계획이다.

 

서성문이 복원되는 과정을 지켜본 주민 박 모(54·서내동)씨는 “서성문 복원사업이 늦어지면서 주변이 빈민촌을 연상케 할 정도로 방치돼 있어서 자녀들 교육에도 문제가 컸는데 이제는 어깨를 펼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처음 계획으로는 서성문에서 나주천, 서성문에서 국도 13호선까지 성벽복원이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업규모가 축소돼 서성문에서 나주천까지만 성벽이 복원될 계획이란다.

 

이번 서성문 복원으로 나주읍성 4대문 가운데 북망문만 복원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중이던 나주목 관아와 나주향교에 대한 종합보존정비계획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오리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