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 시조 조계룡에 대하여...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적을 수 있는 사람은 족보상 夫로 기록된 김인평, 서동요에서 선화공주가 세째딸이라는 기록에서 천명공주의 남편 김용춘과 선화공주의 남편 무왕을 제외하면 진평왕의 사위인 조계룡을 적을 수 있다.
우선 김인평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왕지필 음갈문왕 인평 갑오립..."에서 말하는 인평과 경주김씨 선원세보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으나 실제인물인지에 관하여는 그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평은 선덕여왕의 연호이기도 한데, 해석에 따라서는 지금까지 통상적인 삼국유사의 해석방법인 "..왕지필 음갈문왕, 인평갑오립..을 "...왕지필 음갈문왕 인평, 갑오립.."으로 해석하여 왕의 남편이 음갈문왕이고 이름은 인평이며, 갑오년에 즉위하였다라고 풀이한다면 바로 음갈문왕이 인평(김인평의 성씨 김을 생략한 것으로 보아)이 된다는 것이다.
조계룡에 대한 기록은 창녕조씨 족보에 나타난다. 진평왕이 계룡에게 조씨를 사성하였고, 조계룡은 커서는 진평왕의 사위가 되어 "부마도위"라고 족보상에 적혀 있다. 분명히 진평왕의 사위이므로 서기600년이전에 진평왕에게 딸이 3명 있었다면 선덕여왕의 남편은 바로 조계룡이 된다. 서기600년이전에 세째딸이 선화공주라면 결론적으로 조계룡이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추정된다.
부마도위의 부마는 왕의 사위를 가리키는 말이고 도위는 사위에게 내리는 벼슬이다. 그냥 위는 옹주의 남편이 오를 수 있는 벼슬이고 도위는 그 윗단계인 공주의 남편이 오를 수 있는 벼슬이다. 즉 조계룡이 부마도위라고 적혀 있으므로 조계룡은 결국 공주의 남편이라는 말이 된다. 서기600년경이전에 진평왕의 세딸로 덕만, 천명, 선화가 있었다. 서기600년경에 선화공주까지 혼인한 것으로 보면 조계룡은 바로 덕만공주의 남편이 되는 것이다. 선화공주는 이미 600년이전에 백제무왕의 부인이 된 상태이고, 천명부인은 603년에 김춘추를 낳았으니 이미 602년경이전에 혼인한 것이 되고, 덕만공주는 장녀이므로 천명공주가 혼인하기전에 혼인하였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므로 서기600년경에 혼인하였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계룡의 선조는 비사벌가야(창녕) 출신이다. 서기555년경 진흥왕이 비사벌가야를 평정하고 합병하였는데 왕족을 진골로 편입하였다라고 추정된다. 그러면 조계룡의 원래 성씨는 무엇일까? 원래 조씨인가 아니면 가야의 그 흔한 성씨인 김씨인가? 진평왕이 사성할 때 계룡의 겨드랑이에 "曺"라는 글짜가 있었다라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계룡의 원래 성씨가 "曺"라고 볼 수 있다. 만약 "曺"가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면 사성받을 당시 조계룡은 "曺"라는 글자와 관련있는 벼슬에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조계룡의 선대에 대한 족보가 나타난다면 쉬원하게 풀릴 문제이다. 조계룡의 아버지는 옥결이다. 아직 본인이 확인은 못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선대의 족보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옥결로 된 조씨 족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따른다면 조계룡의 원래 성씨는 "曺"가 된다.
그런데 진평왕이 조계룡에게 사성을 한 때가 진평왕 건복 48년으로 적고 있다. 즉 이때는 서기631년이다. 그러나 이때는 조계룡의 나이가 추정컨대 최소한 50세가 넘은 때가 된다. 기록에 의하면 조계룡은 진흥왕 때 등제한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 진평왕 초기에 20세에 이르러 청룡병이 발병하여 창녕 화왕산에서 기도중에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성으로 "曺"가 된것은 벼슬의 별명을 딴 것으로도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어룡성(御龍省)이 용조(龍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도 한다. 조계룡이 사성받을 당시 아마도 어룡성의 내신으로 있었지 않았나 추정도 해 본다.
조계룡의 원래 성씨를 차치하고서 다시 살펴본다면, "曺"는 우리말로 즉 당시 신라말로 "마실"이다. 마실은 마을이나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曺"는 마실 조, 음갈문왕의 "飮"은 마실 음! 여기서 너무나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실 조, 마실 음! 단지 발음의 억양이 다를 뿐이다. 음갈문왕이 "曺"갈문왕이란 말인가?
조계룡의 후손은 엄연히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바로 창녕 조씨이다. 화왕산에는 용지가 있다. 창녕조씨 시조 탄생지라고 전해 온다. 김씨가 닭은 꺼리듯이 잉어를 삼간다. 잉어는 바로 용왕의 사자이기 때문이다.
족보상에는 조계룡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진평왕의 딸인 천명과 선화는 그 남편이 확연히 기록되어 있고 실제 인물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덕만공주의 남편 즉 선덕여왕의 남편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음갈문왕.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인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라는 기록은 창녕조씨 족보, 경주이씨족보, 경주김씨 족보상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창녕조씨족보에 조계룡은 진평왕의 사위 즉 부마도위로만 적혀 있고 부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부마도위라는 말에서 공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왜 조계룡의 부인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계급사회를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된다. 즉 덕만공주는 여왕이 되기전에는 공주이지만 여왕으로 즉위하면 공주가 아니라 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녕조씨 족보상에 선덕여왕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부부라고 내세우기 이전에 임금과 신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계룡의 묘 자리의 윗자리에 가묘가 있다. 후손들이 그 가묘를 만들었다 한다. 선덕여왕이라고 밝히기를 꺼린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여러 기록을 검토하여 조계룡의 부인이 덕만공주 선덕여왕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놓기 시작하였다.
창녕조씨족보를 살피지 아니하면 선덕여왕의 남편이 누구인지 미스테리일 수 밖에 없다. 김인평이 누구인가? 음갈문왕이 누구인가? 절대로 밝혀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음갈문왕의 음이 마실음, 조계룡의 조가 마실 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미스테리는 풀리는 것이다. 그러면 김인평은 누구인가?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누가 김인평이라고 경주김씨 족보상에 써 넣은 것인지 밝혀지면 모두 풀리는 문제이다. 만약 음갈문왕이 김인평이라면 조계룡이 김인평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조계룡의 원래 성씨가 "김"이고 나중에 지은 이름이 인평, 아니면 누군가가 경주김씨 선원세보에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김인평이라고 써 넣은 것이 된다.
이상으로 삼국유사, 경주김씨선원세보, 경주이씨족보, 창녕조씨 족보를 다 고려하면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이며, 선덕여왕이 여왕이 되기전 즉 갈문왕이 되기 전에는 부마도위 즉 공주의 남편이고, 성씨는 "曺" 인 조계룡(曺繼龍)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참고로 조계룡의 원래 성씨가 가야 김씨가 아닌 원래 "曺"라면, 중국 주나라 무왕의 형제인 진탁의 후손으로서 삼국지에서 거론되는 위나라 조조와 같은 성씨라고 추정된다. 조계룡 선대족보가 나타나면 자연히 풀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창녕조씨 득성설화지>
주소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촌리 산322번지
1760년대(영조대)에 만들어진「여지도서(輿地圖書)」 창녕조(昌寧條)와 1832년에 작성된 「경상도 읍지」창녕조, 그리고 1895년에 작성된「영남읍지」창녕조에 창녕 조씨(曺氏) 득성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2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신라선보(新羅璿譜)」(1912년 발간)의 진평여왕식조(眞平王女息條)에 선덕여왕(장녀)과 태종무열왕의 모친 천명부인(天明夫人(용춘(龍春)의 처(妻), 차녀))의 여동생(3녀)이 태사(太師) 조계룡(曺繼龍)에게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창녕 조(曺)씨 대동보」「창녕 조(曺)씨 천성공파보」와「명미당문집(明美堂文集)」(이건창(李建昌) 저)에 실려 있는「창녕 조씨 영적비명」등에는 득성설화가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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