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주이야기

탐방…설립 100주년 맞이한 나주교회를 찾아서

by 호호^.^아줌마 2008. 10. 9.

탐방…설립 100주년 맞이한 나주교회를 찾아서

‘받은 은혜 100년, 베풀 사랑 100년’ 선포

1908년 서문정교회로 출발 격동의 근․현대사 지역민과 나눠

12일 시민초청 총동원주일, 19일 100주년 기념행사‘다채’


대한예수교장로회 나주교회(담임목사 정영철)가 10일로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 1908년 10월 10일 푸른 눈의 미국인 선교사 클레멘트 오웬(한국이름 오기원)과 한국인 마서규, 임성옥 씨 등이 나주 서문정, 지금의 서내동에 예배당을 개척하고 ‘서문정교회’라 이름을 붙인 것이 오늘날 나주교회의 시초가 됐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역민들과 함께 해 온 나주교회는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표어를 ‘받은 은혜 100년, 베풀 사랑 100년’으로 정하고 앞으로 선교 목표를 지역사회,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데 ‘올인’한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나주교회 설립 100주년의 의미와 비전을 살펴본다.<편집자 주>


1897년 싹튼 나주의 기독교 역사


나주의 기독교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전남지역의 선교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남의 선교역사는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4년 전주에 선교부를 설치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나주에도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전라도의 중심은 전북의 전주와 전남의 나주였기 때문이다.

1897년 목포에서 영산강을 타고 영산포에 상륙한 유진 벨(한국이름 배유지) 선교사 일행은 나주읍성 안에 숙소로 사용할 초가 한 채와 성 밖 향교 부근에 선교기지로 사용을 땅을 매입하는 등 전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나주는 양반세력이 강하고 외국인과 이방 종교에 대한 배타심이 심해서 선교사들에게 방해와 위협을 가했다. 청년들과 마을 주민들이 선교사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을 일삼자 선교사들은 할 수 없이 나주를 포기하고 목포로 선교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광주로 선교지를 옮긴 선교사들은 1904년 12월 25일 배유지 목사의 사택에서 최초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08년 10월 10일 선교사 오웬과 한국인 마서규, 임성옥, 노응표, 조상학 씨 등이 나주 서문정에 예배당을 개척하고 서문정교회라 이름 붙였으며, 이곳에서 배유지 선교사와 변창연 조사가 시무하였다.

이후 1915는 나주시 서내동 10번지에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고 나주북문교회라 칭했으며, 1935년 박석현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면서 선교사들이 추방을 당하고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성북동 60-2번지로 교회를 옮기고 나주읍교회라 개칭했다.

광복은 했으나 사회 전반적으로 혼란과 어려움이 심하던 시절, 지역사회 인재육성에 대한 일념으로 교회 자체적으로 유치원을 설립 운영했으며(1948. 6. 27), 1956년 당시 백민원장이던 이양진 집사가 희사한 한옥 1동과 대지 450평을 확보해 서내동 84번지에 교회를 신축하고 나주교회라 이름하게 됐다.

이후 나주교회는 1983년 1월 30일 성북동 96번지에 350평 규모로 교회를 신축,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회의 분열과 분파


일제치하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나주교회는 분열과 분파의 시련을 겪게된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나주가 피난지가 되면서 북측에서 피난을 내려온 목회자들이 교회를 찾으면서 당시 북측에서 피난 온 강병철 목사가 교회를 이끌어가게 됐는데,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가라앉을 무렵 노회와 교회에서 강 목사에게 다른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옮겨왔다는 이명서를 요구했으나 강 목사가 이명서를 제출하지 못하자 당시 노회와 교회가 정 목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고, 그러는 와중에 강 목사를 비롯한 몇몇 교인들이 따로 나가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가 바로 오늘의 나주제일교회(담임목사 강민수)가 됐다.

나주제일교회는 이 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51년 3월 30일 나주읍 남내리 50번지에 소재한 구제사공장 건물에서 강병철 목사 인도로 17명이 모여서 남문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교회설립 위원으로 이동규, 한남수, 신안나, 이연순, 이부순, 이선자, 김판옥, 주덕순, 정순애 9명을 선정하다.’

나주제일교회는 지난 4월 설립 103주년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이후 1956년 제44회 총회 분규사건으로 또 한 차례 교회 내부의 분열을 겪게 되는데, 당시 분리돼 세워진 교회가 지금의 나주중앙교회(담임목사 최판식). 나주중앙교회는 3년 전 최판식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역사에 대한 자료수집을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미미한 수준에 그쳐 별도의 100주년 행사를 계획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 이전에 세워진 교회들도 있다.

나주시에서 발행한 나주시지(2006년)에 따르면, 금천 광암교회가 1900년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다도 방산교회와 남평교회, 세지 내정교회 등이 각각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은 사랑 베푸는 교회로


나주교회는 선교역사 100년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100년을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앞으로 교회 역사는 사랑을 베푸는 교회로 써 내려간다는 각오를 밝히고 있다.

나주교회는 그동안 지역 안팎에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선교의 사명을 다해왔다.

1979년 7월 노안중앙교회를 개척한 데 이어 1993년 7월에는 금천면 501부대 부근에 밀알교회를 세워 군 선교와 지역선교에 디딤돌을 놓았다. 아울러 1998년 4월에는 금성산 공군부대교회를 건축했으며, 2002년부터 올해까지 남태평양 섬나라인 바누아투 공화국에 3개의 교회를 개척해왔다.

이런 가운데 지역 청소년과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활동으로 1978년부터 매년 지역에 거주하는 중․고․대학생에게 총 6억원에 이르는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다.

아울러 2000년부터 지역 노인 100여명을 대상으로 은파대학을 개설, 평생교육과 봉사의 장을 제공해오고 있으며, 2004년도에는 국제결혼한 이주여성과 외국인 근로자 등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외국인 쉼터를 마련,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한글․컴퓨터 교육과 다채로운 문화활동 등을 통해 이들을 나주의 한 가족으로 보듬는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나주교회는 오는 12일 총동원전도주일에 이어 19일 100주년 기념행사 및 100주년 기념음악회 등의 행사를 통해 시민 각계각층과 함께 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한편, 나주교회는 3월 나주시와 지역사회 의료 소외계층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저소득층 수술비 지원협약을 맺고 1천만원의 기금을 전달한 바 있으며, 4월에는 교인 3백 48명이 참가한 가운데 사랑의 장기기증운동을 펼친 바 있다. 김양순 기자


 

◇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는 나주교회가 지역사회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 100년을 선포하고 있다.


 

 

◇ 지역사회 인재육성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설립된 나주교회 유치원. <사진은 1953년 3월 졸업식 모습. 나주시 서내동 오남선 씨 제공>

 

나주교회 정영철 목사

 

인터뷰

“교회는 세상에 희망이 돼야 합니다”

나주교회 정영철 목사


나주교회 설립 100주년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천년 목사고을’ 나주에서 겨우 100년의 역사를 두고 자랑할 거리가 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제치하,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나주교회가 복음의 씨앗을 틔워 이렇게 성장했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나주의 역사에 있어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혼돈과 혼란, 가난과 핍박의 시기에 지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또 지역사회의 한 버팀목이 되었다는 점에서 교회의 역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나주교회 설립일을 1908년 10월 10일로 보는 근거는 어디에 두고  있는지요?


나주교회의 역사가 1903년이다, 1905년이다... 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초교파적으로 씌여진 ‘조선장로교사기’에 보면, 1908년도에 세워진 교회 이름들 속에 나주교회가 있습니다. 문헌상 기록된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립일자는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서 교회사가들의 자문과 다른 교회의 사례를 들어  우리교회 자체적으로 정한 것입니다. 나주배와 쌀을 수확하는 10월, 그 가운데 가장 기억하기 쉬운 날로 하자고 해서 10일로 정하고 시무장로님과 은퇴장로님들의 연석회의를 통해 10월 10일로 정한 것입니다.


기록에서는 나주 최초의 교회로 서문정교회를 들고 있고, 이를 모태로 하는 교회가 세 교회가 있는데. 현재 이들 교회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나주교회가 우리지역 최초의 교회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나주교회가 100년의 역사를 지탱해왔고, 또 이웃하고 있는 두 교회가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다만 이 가운데 한 교회는 교파가 분리되면서 나뉘어졌고, 다른 한 교회는 목회자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시비 끝에 분리돼 나가 세워진  교회입니다. 누가 장자 교회인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교회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200주년의 역사를 앞두고 나주교회가 갖고 있는 비전은 무엇인지...


오는 21일이면 나주교회에 부임한 지 만 7년이 됩니다. 그동안 저는 주로 교회의 내치(內治)에 힘써왔습니다. 현재 교회를 이전할 계획으로 인근에 2천2백평의 부지를 매입해서 앞으로 2~3년이면 부지매입비를 모두 청산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관심은 교회 밖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교회, 지역민들이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교회로 나아갈 계획입니다. 이에 맞춰 교회 예산에 대한 방향도 정립해 나가겠습니다.

현재 교회 신축부지로 매입한 땅에 대해서는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현재 교회 예배당이 비좁고 공간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앞으로 20~30년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주시가 옛 나주세무서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와 연계해 지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최근 유명 연예인의 잇단 자살을 계기로 이른바  ‘자살 권하는 사회’에 대한 충격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어떤 치유책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아울러 이런 세태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이들이 죽음을 교리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가 참 크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보다 못한 사람들도 사는데 왜 죽느냐 하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너무나 독소적인 시대사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사회적인 각성이 필요하고 더구나 교회는 이런 아픔,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는 도저히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도피처’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담․정리 김양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