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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여성칼럼 - 축제 한마당

by 호호^.^아줌마 2009. 3. 16.

김현임 여성칼럼  - 축제 한마당


남미의 어느 저녁일까. 큰 체구의 아버지는 파이프를 물고 시선 느긋하고 세월만큼 불어난 당신의 몸피에 꼭 낀 찰랑찰랑한 원피스, 명랑한 표정의 어머니는 열일곱 쯤 되는 아들을 파트너로 춤을 추셨다.


어느덧 춤이 무르익으면 할머니까지 모두들 일어나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흥겹게 몸을 흔들던 그 밤의 열기. 초대장을 받고 내심 그런 밤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2월을 마지막 보내는 토요일 오후 내 집 인근의 천연염색관에서 시낭송회가 열렸다. 딸이 다달이 부쳐주는 ‘좋은 생각’의 정기 구독자이긴 하지만 시와는 평생 무관히 살아오신 시앙동댁 아짐도 함께 나섰다. 


딱히 돌봐야할 과일도, 꽃도, 과실나무도, 밭곡식도 없는 절기에다 종일 가야 몇 사람의 기척조차 없는 한적한 마을에서 모처럼 사람구경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오래 전, 엄마인 내 극성에 일기장을 앞에 두고 끙끙대는 제 오빠에게 두 살 터울의 딸아이가 그랬다. 지금 일기가 쓰기 싫어 죽겠는 오빠 심정 그대로 쓰면 그만이지 뭘 그리 끙끙 거리냐고. 

어느 시인 역시 그랬다. 시는 대단한 말로 애써 포장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적어내는 것도 아주 훌륭한 시가 될 수 있다했다. 대부분 유명 시인의 알려진 시구(詩句)들을 낭송했지만 자작시를 취한 표정으로 읊던 이에게는 아주 뜻 깊은 밤이었으리라.  


지금 미국에선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중이란다. ‘스포큰 워드(spoken word)’라 했으니 맛깔스럽게 말하기랄까. 이른바 넓은 의미의 시낭송이다. 단지 시어의 의미보다는 귀에 들리는 맛을 살리기에 치중하는, 그래서 무엇보다 언어의 음향적 효과를 살리려 동음이의어의 활용과 각운을 부각, 결과적으로 노래와 시낭송 사이의 이중효과를 내는 범국민적 시 전승 기류인 ‘전미 시 낭송대회(National poetry slam)’가 활발하다 했다.


‘마을을 찾아가는 시낭송’이라면 어떨까. 거창하지 않아서 더더욱 좋은, 도란도란 열린 가족 모임 같다는 게 이번 시낭송회의 느낌이었다. 치열한 생활전선에서 만나는 살벌한 단어들에 식상한 우리들의 귀를 위무하여 주는 음악, 시어들의 감미로움도 좋았다.


반찬 몇 가지 장만해 이웃 불러 저녁 대접하는 데도 망설여지는 세태에 무대 마련의 이런저런 번거로움이 왜 없었겠는가. 규모는 작지만 큰 행보의 첫 발을 내디딘 행사에 크게 박수 친 이유다. 잔치 마당이 우리 고유의 빛깔들이 어우러진 장소인지라 천연 염색한 우리 옷으로 단장한 출연진들의 무대의상 면모도 특별했다.


영산강 흐르는 강변길 따라 고즈넉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때마침 걸려 있던 초나흘 달에 허밍으로 불러보는 우리 가곡 ‘달밤’은 해군군악대의 연주로 한층 고조된 그 밤의 분위기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