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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스크랩] 그리운 요크셔

by 호호^.^아줌마 2009. 11. 13.

  너무 놀란 나머지 현관문을 여는 내다리가 후들거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유난히 밤이 이른 시골마을의그 시각은!) 쏟아지는 겨울 폭우 속에 서 있는 남자, 게다가 기다란총까지 어깨에 걸친, 그의 뜻밖의 방문은 사뭇 소설적이기까지 했다.

  때마침 내가 '롤라를 데리고 간 것은잘못이었다. 자그마한 시골 정거장에서 기차를 내리자 나는 곧 그것을깨달았다.'로 시작되는 그레이엄 그린의 '귀향'을 읽고 있던 중이어서일까. 자꾸만 투덜거리는 여자를 술집에 홀로 남겨두고 어둑신한 유년의밤거리를 더듬는, 이제는 俗人이 된 중년의 사내가 하룻밤을 산 창녀와함께 밟는 고향길의 여정에서 나는 미처 헤어나지 못했던 것도 같다.

  "이 시간, 이 빗속에 내가 왜 여길왔는지 모르겠소."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마루에 들어서면서 그가 한첫 마디다. 하긴 내 집에 머무는 십 여분동안 그는 몇 번이나 그 말을되풀이했는지.

  나는 그를 모른다. 한적한 시골마을의규약대로 내 집에서 상폿계를 치루던 날(喪을 당하면 상여를 매는 품앗이계)에비로소 첫 대면을 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내가 이 곳으로이사 온 지 3년이 넘었으니 먼발치에서 면식이야 있었겠지만. 아무튼入契의 통과의례로 음식을 장만한 내가 동네 사람들을 두루두루 초대한자리였다.

  총을 맨 술 취한 사내라니. 아이구,남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딸애에게 눈을 꿈쩍였다. 옆집아짐에게 빨리 와 달라는 전화를 하라 시키는 내 작은 목소리는 얼마나떨렸는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더라고 잠 덜 깬 아짐이 영문모른 표정으로들어서고, 그의 총을 건네 받아 쇼파의 방석 밑에 두고 나서야 가까스로안심이 되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빗방울이마치 볼 위로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개를푹 숙인 채 있다가 문득문득 정신을 수습해야겠다는 듯 툭툭 뱉는 말이었다.예의 자신이 왜 내 집을 향했는지 모르겠다는 말 틈틈이 '마음의 사냥','그냥 꼭 한 번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중퇴다.'이런 따위의 말 사이사이에 잊지 않고 꺼질 듯한 한숨을 섞었다.

  드날리는 의사신분인 큰형님을 가진(실제로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조성한 그의 형님의 농장과 별장은 차를 타고야둘러볼 수 있다는 마이클 잭슨의 저택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갖가지조각품들과 기암괴석, 화초들이 들어 차 있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다.), 그의 또 다른 형님도 의사라던가. 큰집에양자를 가서 겨우겨우 의대를 마쳤다는 큰형님을 비롯해 하나같이 잘나가는 형제들 틈바구니에 중학 중퇴의 그는 별종이긴 별종이었다. 차를몰고 그대로 강에 쳐박히질 않나. 걸핏하면 음주교통사고를 내곤 한다는이 곳의 트러블메이커이며 꽤 영업이 잘되는 장어요리집 사장인 그.그가 낯 선 대신 연세가 85세에 이른, 백호 임제 선생님의 14대 손인그의 아버지와 나는 꽤 친하다. 시와 풍류에 능한 그 분을 대하면 몇백 년 거슬러 백호 선생님을 마주 대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면그는 그 유명한 백호 선생의 15대 손인 셈이다. 어쨌든 당신 평생 스스로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는 그의 아버지에게 자식들의 원망은 대단하여거의 돌아다보지 않는 정도라던가. 그런데도 여러 형제 중 늙은 부모들에게는제일 효자라는 칭송이 자자하다는 그.   

  삶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길 즐기는장난꾸러기 물줄기다. 바짝 긴장하여 제 물꼬를 잡지 않으면 여름 볕에바짝 말라버릴 모롱이 내로 전락할 위험성이 다분하다. 바다로 가고싶은 原流의 의도를 배반하는 내 속의 작은 支流들의 아우성.

  우산을 거부하고 성큼성큼 어두운 폭우속으로 다시 들어서는 그. 그를 보내어놓고 곰곰 생각한 문구다. 그리고한참을 이어지는 생각은 한 사내의 진한 쓸쓸함에 대하여 서다. 어쩌면잠시 누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곤하디 곤한 삶의 한 자락을 위로 받고싶은 심정에 복받쳤었을까. 가능한 빨리 그를 내 집에서 몰아내야겠다는궁리에 골몰하였을 뿐, 그의 맘 편한 누이가 되어주지 못하였음에 마음이아프다.

  문학기행을 온 이들이 자꾸 '폭풍의언덕'의 저자, 에밀리 브론테의 生家 기와 조각을 떼 내 오는 통에 골머리를앓는다던가. 그 또한 작가를 지극히 사랑하는 독자의 병적인 표현이아닐까. 히이드꽃 만발한 황량한 벌판 같은 세상, 해의 기척이라고는종일 구경키 힘든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는 영국의 어느 겨울밤, 겨우내콜록거리며 기관지를 앓는 소녀가 밤새 끄적이는 연필심 소리 같은 이빗소리가 그를 부추겼을까. 술 깨인 다음날이면 한없는 수치심에 휘감길그를 위해 내가 해 줄 일은 그 행위의 까닭에도, 의미에도 超然해 주는것이려니. 돌이켜 보면 나 또한 견딜 수 없는 허허로움에 불빛 노란타인의 창가를 얼마나 서성거렸던가.

  끊임없이 제 삶에 불쑥 끼어 드는 어떤존재. 사람들은 좀처럼 그 정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피와 유령이등장하진 않지만 에필로그에 이르도록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영화 '디아더스'의 스릴러 장치다. 지루한 영화는 견딜 수 없다는 아메나바르감독은 이런 얘기를 했다. 자신은 관객만 생각해서 영화를 만드는 게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남들이 나와 소통해주길 바라면서 영화를 만든다고.그렇다면 이런 비약은 가능한가. 도덕과 규율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룰이다. 우리는 그것에 평생을 복종해야만 할까. 우리의 이런 반역을너그러이 묵과해 줄 수 단 한 사람이 있으리란 기대로 가끔은 전적으로우리 마음만을 위하는 일을 벌이고도 싶다고.

  한밤중 장총을 들고 겨울비와 술에 흠뻑젖은 채 들어서는 사내는 우리 모녀를 혼비백산하게 하긴 했다. 더구나딸과 나는 요즘 하루의 대부분을 음울한 내용의 소설에 푹 파묻혀 지내고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요 근래에 일어난 요오크셔의 유학생 살인, 실종사건은 아직 오리무중이란다. 이런저런 이유라고 하더라도 내 어찌 그를용서 못 하겠는가. 그 역시 며칠째 내리는 비에 부피가 더해 가는 그의우울을 누군가와 잠시 덜어내고 싶었음이리라. 늦게 귀가한 덕분에 그의방문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남편이 미처 치우지 못한 담배재의 출처를묻자 나는 이렇게 둘러대었다.

  "오메, 뭣에 체했는가 가슴이 하도답답해서 한 모금 피워 봤제."

마침, 마침 말이다. 우리 집에 도대체 풀리지 않는답답한 문제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  우진  hik0518@hanmail.net



출처 : 우진의 오솔길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김현임 선생의 블로그에 있던 글. 읽고만 나오려는데 자꾸 가슴에 엉겨붙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