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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천하의 불쌍한 사람들

by 호호^.^아줌마 2009. 12. 2.

천하의 불쌍한 사람들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다산집』에「의엄금호남제읍전부수조지속차자(擬嚴禁湖南諸邑佃夫輸租之俗箚子)」란 긴 제목의 상소문이 있다. 맨 앞에 ‘의(擬)’ 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원래 임금에게 올리려 했던 것이다. 


땅주인에게 수확의 절반을 주고 이리저리 떼고 나면


상소문의 내용은, 상소문 제목에 이미 다 나와 있다. 호남 지방의 여러 고을에서는 전부(佃夫), 곧 소작농이 토지세를 내고 종자도 직접 마련하는데, 이것을 금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자기 땅이 없는 농부는 남의 땅을 빌려서 경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보통 땅을 빌리면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로 수확물을 나눈다. 땅주인에게 수확물의 50%를 주는 것이다. 남은 50%가 소작인의 몫이다. 이것만 해도 소작인의 생활이 참담하게 될 것은 당연지사인데, 이 50% 안에서 소작인이 더 부담해야 할 것이 있으니, 정말 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땅주인은 원래 수확물의 10%를 나라에 세금으로 바쳐야 한다. 경기도의 경우, 이 세금을 주인이 부담하지만, 호남의 경우는 소작인이 부담한다. 소작인의 부담률은 60%로 높아진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음해 파종할 종자를 남겨두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호남에서는 소작인의 몫이다. 만약 5%를 종자로 남겨둔다면, 소작인이 먹을 수 있는 양은 35%에 불과한 것이다.


다산은 호남 지방은 1백 호 중에서 자기 땅을 남에게 빌려주고 먹고 사는 지주가 5호, 자기 땅을 자기가 경작하는 자작농이 25호, 그리고 남에게 땅을 빌어 경작하는 소작농이 70호에 이른다고 한다. 즉 다산의 시대 호남 농민의 70%가 소작농이었던 것이고, 이들은 경작물의 35%만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춘궁기에 관청에서 빌려 먹은 환곡을 갚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남을 것이 있을까?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아아, 소작인의 1년 농사는 6,7말에 불과합니다. 땅주인에게 바칠 것을 실어내고 환곡을 갚으면 그 해가 다 가기도 전에 벌써 굶주림에 오랫동안 떨게 됩니다. 어떻게 임금에게 바칠 세금을 마련해 내겠습니까? 면포를 짜서 마련할 뿐인데, 그나마 병이 들거나 죽거나 하면 납기일에 맞추어 낼 수가 없어, 솥단지를 팔고 송아지를 팔게 되니, 그 상황이 처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어찌 이런 상황을 내버려 두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부자들이야 괜찮겠지만, 이 외로운 사람들이 불쌍하구나.”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땅을 빌어주어 소작료를 받는 사람은 대체로 부자들입니다.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인정(仁政)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정치를 하지 않으시는지요?


다산은 왕(아마도 정조일 것이다)에게 5%의 힘센 부자를 억누르고 나머지 95%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어진 정치를 베풀라고 권고하고 있다. 참으로 정의로운 정치다.


“이 외로운 사람들이 불쌍하구나!”


다산이 인용하고 있는 “부자들이야 괜찮겠지만, 이 외로운 사람들이 불쌍하구나.”는 구절은 『시경』 소아(小雅)의 「정월」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맹자』에도 거듭 인용되어 있다.

맹자는 왕정(王政), 곧 인정에 대해 묻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정치가 맨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은,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 늙어서 남편이 없는 과부, 늙어 의탁할 자식이 없는 노인,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 등 천하의 하소연할 곳 없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인 바, 주(周)나라 문왕은 바로 이 네 부류의 사람을 가장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할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런 말을 하면서 『시경』의 해당 부분을 증거로 인용했던 것이다.


사실 그렇다. 맹자와 다산, 그리고 『시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정치가 먼저 돌보아야 할 대상은 명확한 것이다. 한데 지금 우리나라 정치는 과연 저 2천 년 전의 유가의 정치의식을 넘어서고 있는지 의문이다. 용산 철거민에 대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재판 결과를 보고 문득 호남 농민을 걱정하던 다산이 떠올랐다. 정말 울울하구나.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