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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젊어서 겪은 전쟁의 아픔 늙어서도 서러워”

by 호호^.^아줌마 2009. 12. 22.

 

“젊어서 겪은 전쟁의 아픔 늙어서도 서러워”

…나주시 경현동 죽마고우(竹馬故友) 황이환·박순채 씨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박순채<사진 오른쪽>씨에게 황이환<사진 왼쪽>씨는 죽마고우 이상의 의지가 되고 있다.

 

 

“젊어서 애먼 일로 고생하던 사람이 나이 팔순이 넘어서까지 그런 서러움을 당하고 사는 게 영 딱하더란 말입니다. 자식들 있다고 시에서 몇 푼씩 나오던 지원금도 끊겨불고...”

 

한 마을에 사는 박순채(80)씨의 딱한 사정을 전하며 꼭 한번 취재를 해달라는 황이환(79·경현동)씨를 따라 나서던 날, 며칠째 겨울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경현동 마을을 지나 외딴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집으로 들어서기에 “사시는 곳은 웬만하시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집 뒤안으로 돌아서 따로 난 쪽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박 할아버지는 이곳에 세 들어 살며 가축들 먹이를 주는 등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그 때 입었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박순채 씨.

 

한국전쟁이 나던 해 박 씨는 스물 한 살의 열혈청년이었다. 당시 금성산은 밤손님이라 불리던 빨치산의 출몰이 잦았고 마을 주민들은 밤낮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당시 마을에서는 청년 41명이 마을경비와 야경을 도는 모임을 조직해 활동을 했는데, 박 씨도 그 일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당산나무 아래서 청년들이 모였는데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가 누구냐고 하니까 도망갔다.

 

주민들은 그가 ‘밤손님’이라고 생각하고 경찰에 알리자고 했고, 박 씨는 지금 고인이 된 이남준 씨와 함께 경찰서로 향하던 도중 지금의 한수제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빨치산에 붙잡히게 됐다.

 

이들을 포박한 그들은 오두재쪽으로 이들을 데리고 가다 죽창으로 몸을 찔러 댔다. 결국 둘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한참 뒤 박 씨가 정신을 차리는 기색을 알아차린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아직 덜 죽었다”며 돌덩이로 박 씨의 머리를 내리쳤다. 박 씨의 머리에 난 상처자국은 그 때 생긴 것이다.

 

이렇게 쓰러져 어두운 밤 생과 사의 길을 오가는 두 사람을 구한 이는 한 마을에 사는 김꽃단 씨였다. 그녀는 마을로 뛰어가 이들의 소식을 전하고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이들을 따뜻한 곳으로 옮겨 치료했다. 병원으로 가기에는 늦은 통금시간이었다.

다음날 옛 나주병원(금계동 소재)에 입원해 치료를 하다 6개월만에 퇴원했지만 결국 박 씨는 장애5급이라는 상처를 떠안고 살게 됐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던 그가 군에 징집된 것. 논산을 거쳐 강원도 22사단(1953년 5월 창설) 백마고지지구 전투에 투입됐다.

 

다행히 전쟁터에 나간 지 1주일만인 1953년 7월 25일 휴전이 선포돼 그는 살아 돌아왔고 참전용사가 됐다. 또한 그의 목숨을 구해준 김꽃단 씨와 결혼, 슬하에 5남매를 두고 단란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자식들은 모두 출가를 하고 20여년 전 상처(喪妻)한 상태에서 홀로 살아오던 박 씨는 나주시에서 나오는 생계보조금으로 한 달에 9만원씩 하는 집세를 내며 근근이 생활을 해왔는데 얼마 전부터는 보조금이 중단되고 의료보호만 받을 수 있게 됐다. 자식들이 많다는 이유였단다.

 

옆에서 사정을 듣고 있던 황이환 씨는 “자식들이 있긴 하지만 실직과 이혼 등으로 저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도움 받을 형편이 못 된다”며 “하다못해 한겨울에 난방이라도 할 수있도록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거들었다.

 

전쟁통에 장애를 입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박순채 씨에게 황이환 씨는 친구 이상의 가족 같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