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이야기

김수평..어느 외과의사

by 호호^.^아줌마 2010. 2. 20.

어느 외과의사

 

김수평

 

세상에는 비명횡사하는 사람이 셋이 있다. 병이 있어도 치료하지 않는 사람, 치료는 하면서도 삼가지 않는 사람, 교만하고 방자하여 도리와 순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 이러한 병자는 하늘이나 조상, 임금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구비유경 제1다문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지난겨울 등에 생긴 종기 같은 것을 하찮다 싶어 방치한 잘못으로 고생을 사서 했습니다. 초기에 병원을 찾았더라면 간단했을 것을 다급할 때까지 병을 키운 무지로 수술까지 하면서도 두 달 가까이 고생고생 했습니다. 바로 내가 세 사람 가운데 ‘병이 있어도 치료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병원도 쉽게 가지를 못하고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동생이 병원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옹색한 일이 생기면 다부지게 처리하지 못하고 누구에게 은근히 기대고 싶은 나약한 성격 탓이겠지요. 그러면서 ‘서양은 법이 지배하는 사회고 동양은 관계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서양은 사소한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이 법무장관일지라도 ‘법대로’ 처리하는 사회란 뜻이겠지요. 반면 동양은 집을 지을 사람이면 마땅히 행정기관의 관련 부서로 가야 할텐데 업무와 아무 관계없는 부서의 친구를 찾아가 “건설과에 아는 사람 없는가?” 하는 식의 ‘관계’를 찾아간 셈이지요.

 

친구 동생인 그 의사와는 별로 왕래가 없는, 그래서 서먹한 사이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 문을 들어선 나를 보자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문득 요즈음은 ‘장사치보다 더 아양을 떠는 개인병원’이라고 자조적인 말을 하던 어떤 의사가 떠올라 혹시 계산된 친절일까 뭘까?


우리 사회에서 꿇릴 게 없는 신분이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와 같은 ‘사’자 붙은 사람들입니다. 평소 나는 이런 부류에 유난히 ‘거부세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의사만 해도 환자에 대한 따뜻함보다 돈을 좇는 메마른 ‘의료 기술자’라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습니다. 의료를 뜻하는 메디신(medicien)이라는 말이 하느님과 인간의 중간이라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암튼 두 달 가까이 치료 받으면서 말도 건네고 유심한 눈으로 그 의사를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던 그런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항상 웃습니다. 나만이 아니고 환자 모두에게. 지어서는 그리 못합니다. 얼굴이 환하고 활력이 넘칩니다. 신바람이 들썩들썩 합니다. 조그마한 개인병원 의사지만 ‘잘 익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스펀지에 물 스미듯 했습니다.


“형님, 요새 의사들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악도 하고요.”

 

그렇구나. 내 생각이 편협했구나. 나뭇잎의 얼룩보다 숲을 보아야 겠구나. 이 외과의사는 등만 수술한 게 아니고 마음의 주름도 펴 주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눈이 환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치료비를 받지 않습니다. “형님 치료비는 다 내주는 데가 있습니다.” 의료보험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얼마씩은 받아야 할텐데. 결국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병 치료에 빚을 진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세 사람은 아테네 시민에 의해 고소되어 501명으로 구성된 배심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그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임종 때 친구인 크리톤에게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신에게 닭 한 마리를 잊지 말고 선사해 주게. 내가 빚진 게 있었어.”하며 일흔 살에 숨을 거둡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나면 의신(醫神)인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고 닭 한 마리를 선사했던 모양입니다.


약과 사랑을 더하면 그 보다 더 좋은 치료제가 없다고 합니다. 내 등을 수술한 의사는 인정 없는 ‘의료 기술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 냄새를 피우는 따뜻한 의사였습니다.


닭 한 마리를 선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