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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주문이 많은 음식점

by 호호^.^아줌마 2010. 8. 25.

 

김현임 칼럼주문이 많은 음식점


난설헌, 허초희의 작품을 비롯해 우리의 고대 시문학에 매료된 이방인, 이 고장이 배출한 걸출한 대문호 백호선생님의 오랜 추종자의 성함도 겐지다. 일찍이 백호 기념사업회로부터 정중한 세미나 요청을 받을 만큼 심도 있는 연구자, 그 또한 비문학도(非文學徒) 출신이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다. 공연히 풀 죽는 요 며칠 저절로 읊조려지는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를 쓴 미야자와 겐지와.

 

청중들로부터 탄성과 멸시를 동시에 받은 작곡가 말러, 이십 대의 어느 날 그의 음악을 듣고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큰 충격을 받은 청년은 원대한 포부를 품게 된다. 그때까지 악보는커녕 겨우 높은음자리표나 간신히 구분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언젠간 반드시 말러의 교향곡을 직접 지휘해 보겠노라는 자못 황당한 꿈이었다.

 

마침내 그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과감히 시간과 돈과 열정을 투자하여 말러에 빠진다. 돈 많은 졸부의 해프닝쯤으로 폄하하던 사람들의 평가가 어느 순간부터 찬탄으로 바뀌었을까. 길버트 카플란은 말러에 관한한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뛰어난 연주자로 꼽힌다. 맞다. 누군가를 향한, 무언가를 향한 오롯한 열정 쏟기는 뜻밖의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그건 그렇고, 참으로 고약한 독자의 출현이다. 필화(筆禍)라면 두 번째 필화다. 첫 번째는 이십여 년 전 내 데뷔작을 도용해 두둑한 원고료까지 챙긴 대구청년의 사건이 있었고, 덕택에 좋은 잡지와 글로 인연을 트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번엔 생각지도 않은 인신공격형 독자다. 그것도 글이 아니라 남편이 찍어 준 프로필 사진을 문제 삼아 지면에서 삭제하라 요구하는 엉뚱한 독자, 빈총도 안 맞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었던가.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글은 언감생심, 이번에도 결국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집에서 위로를 청하는 나다. 세상은 참으로 ‘주문이 많은 음식점’이었다. 기호에 맞추려 나름대로 필사의 노력하나 싱겁다 짜다 투덜대는 까다로운 고객투성이, 그렇다고 섣불리 폐업할 수도 없다. 내놓은 요리마다 맛나다 격려해주는 고마운 손님들 때문만은 아니다. 갈수록 나아지리라 믿는 내 요리에 대한 자긍과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글이라는 이름의 요리 하기를 너무도 좋아하는 내 품성 때문이다.

‘이 근방에 있는 산은 너무 적막하군. 새고 짐승이고 한 마리도 없다니까’

 

이 구절이 오늘 따라 아프게 읽힌다. 독자에게 감흥을 제공치 못한다는 내 글에 대한 그의 힐책 아닌가. ‘사슴의 누런 옆구리에 두세 발 먹이면 아주 통쾌하겠지. 비틀비틀 거리다가 픽하고 쓰러질 거야’ 그가 노리는 목적이 바로 이것 아닐까싶어 이제부터는 내 항변의 구절들을 추려 옮긴다.

 

‘누구든 들어오십시오. 특히 젊은 분은, 그러니까 사고(思考)가 젊은 분은 대환영입니다. 손님 여러분 입구에선 머리를 단정히 빗고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 주십시오. 총과 탄알은 여기에 놓아두십시오. 모자와 외투와 구두도, 넥타이 핀, 소매 장식용 단추, 안경, 지갑, 기타 금속류, 특히 뾰족한 물건은 모두 여기에 놓아두십시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시시콜콜한 개인적 사연은 앙다물어 생략한 내 글이 미각에 맞지 않았다면 과감히 발길 끊으면 그만 아닐까. 격(格)까지 들먹이는 독설의 후유증에 ‘주문 많은 음식점’의 마지막 일갈을 빌린다. 평화롭게 노니는 숲의 순한 동물들을 향해 총을 겨눈 두 사냥꾼의 ‘한 번 휴지같이 돼 버린 얼굴만은 도쿄에 돌아와서 목욕을 해도 다시 원래대로 고쳐지지 않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