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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수평 살며 사랑하며… 지는 꽃, 이왕에 질 거면

by 호호^.^아줌마 2010. 9. 7.

김수평 살며 사랑하며…  지는 꽃, 이왕에 질 거면


 

김수평 / 나주뉴스 NPC위원


나는 꽃을 좋아합니다. 그 정도가 보통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꽃보다 목이 가늘어 애잔해 보이는 소녀같이 가녀린 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책상 한 켠에 늘 조그마한 화분이 놓여있습니다. 이번 것은 잎이 유난히 짙푸르고 꽃이 연지처럼 붉어 제법 요염해 보입니다. 분(盆)이 도자기처럼 고급한 것이 아니어도 빛깔이 어찌나 하얀지 정갈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보아도보아도 물리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 핀 꽃이 지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기(?)하고 있던 봉오리에서 피고 또 핍니다. 꽃 잔치가 멈추지를 않습니다.

꽃도 유심히 보면 지는 모습이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사람처럼 안쓰럽게 지는 꽃이 있습니다. 무에 그리 한스러운지 갈 때 가지 못하고 찌그러진 모습으로 한사코 매달려, 지면서도 자신을 추하게 만드는 꽃도 있습니다. 또 한 잎 한 잎 떨어져 눈처럼 날리는 꽃도 있습니다. 배꽃이 그렇습니다. 하여 조선의 기녀(妓女)는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절절히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내 책상 위의 꽃은 지는 모양이 특이합니다. 뚝 떨어집니다.

“아! 아깝다. 좀 더 피어도 되련만….”

사람으로 치면 스무 살 한창 나이에 지는 것 같아 몹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차마 버리지를 못하고 책상에 누워있는 채로 한 이틀 더 두고 봅니다. 생의 마지막을 저렇게 용기 있게 추락하는 것이 저 꽃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다소 까탈스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꼬장꼬장하기가 남산골딸깍발이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도 한 번 마음을 열면 상대 눈치 볼 것 없이 혼자서 열을 냅니다. 그러니 지금껏 짝사랑 원 없이 했을 겁니다. 하지 않아도 될 가슴 아린 인생 공부도 하면서.

그날, 철쭉꽃 지는 늦봄에 마음 기우는 대로 평소 흠모하던 선배님을 찾아갔습니다. 철학교수는 많아도 철인은 드물다는 시대에 그분은 철인이 아니라 교양인으로서 거친 내 성정(性情)을 순화해주시던 분이었습니다.

자연의 한 가지를 옮겨놓은 듯 결코 요란하지 않은 정원에 내가 선물한 오엽송이 푸르고, 봄 햇살 내리는 포석정 닮은 연못가에서 얘기도 나누고 술도 나누었습니다.

“선배님, 저 철쭉이 한창 필 때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니 지는 모습은 영 추하네요.”

“응, 박○○ 총 맞아 죽은 꼴하고 안 같은가.”

지는 꽃을 보면서 한 사람은 그냥 추하다 말하고, 한 사람은 절대 권력이 어떻게 부서지는가를 선문답처럼 말하니 같은 눈이라도 세상을 보는 눈은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합니다. 그런 권력은 폭력이 됩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기에 권력의 정점에 선 절대자가 총에 맞아 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접었던 모양입니다. 넘치게 아름다운 철쭉꽃이 추하게 지듯.

꽃이 집니다. 사람도 집니다. 꽃이나 사람이나 자기에게 배정된 시간만큼 살다 갑니다. 그래서 릴케는 ‘죽음이 잠시 우리에게 빌려 준 목숨만큼 살다가 죽음이 다시 그 목숨을 거둬들이면 그뿐’이라 했을까.

그런데도 인간은 죽음 앞에서 삶의 끈을 차마 놓지 못하고 연연해합니다.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진시황이 그랬습니다. 오래오래 살고자 불로초를 구해오라 했습니다. 병으로 마흔아홉에 죽었습니다. 억만장자인 미국의 록펠러가 아흔아홉의 자웃한 나이에 백 살을 채우려고 자기의 병을 낫게 해주는 사람에게 2백만 달러를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한 살을 더 보태지 못했습니다.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정해진 곳으로 흐르는 하늘의 뜻을 누가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결이 서늘해졌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이 오만하고 방자하게 덥던 여름도 도리 없이 가을에게 자리를 내 줄 것입니다. 이렇듯 때가 되어 떠날 줄 아는 것이 계절입니다. 다만 때가 되어도 떠나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입니다. 마른 장작 같은 팔뚝에 주사 한 대라도 더 맞아 살아보겠다고 매달리는 모습이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오만한 인간이여, 순명하라’는 말이 죽비 소리로 들립니다.

꽃 한 송이가 떨어져 책상에 누웠습니다. 뒤끝 없이 뚝 떨어진 모습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꽃이 저러할진대 어차피 갈 거면 우리네 인생도 아름답게 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생각이 깊어진다는 가을이 저만치서 오고 있습니다. 가을이 익으면 성가시던 여름도 다시 그리워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