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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사람들

나주 샛골의 직녀할매 노진남 씨

by 호호^.^아줌마 2011. 8. 24.

◇ 중요무형문화재 샛골나이 노진남 씨

 

 

나주 샛골에는 직녀할매가 산다

… 샛골나이 명인 노진남 할머니 

 

견우의 노래

                                    서정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 갔다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녀여, 여기 번짝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직녀의 베 짜기라고 하면 으레 칠월 칠석을 떠올리지만 사실 여름에는 베를 짜지 않는다. 땀이 차서 무명베를 짜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름은 무명베의 원료인 목화를 따서 말리는 일을 해야 하는 계절이다. 나주의 다시면에 있는, 무명베를 짜는 장인의 집에서는 여름 볕에 탱글탱글한 목화가 익어가고 있었다.

 

예로부터 나주는 개성, 진주 등과 함께 고운 무명의 산지로 유명했는데, 옛사람들은 나주에서 나는 고운 무명베를 '나주 세목細木'이라 하였다. 세목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목화가 좋아야 한다.

 

나주는 볕이 잘 들고 물이 풍부한 고장이라 풍성한 목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샛골의 여인들이 베를 잘 짜서 '샛골의 직녀들'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말이 전한다. 가늘고 곱기로 유명한 샛골의 무명은 비단보다도 더 곱다는 대찬大讚을 받기도 했다.

1968년부터 샛골의 직녀들과 그들이 하는 일을 모두 '샛골나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단보다도 더 가늘고 고운 무명베를 짜는 샛골나이

 

나주로 들어와 샛골나이 노진남의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우리는 기이한 풍경과 마주쳤다. 지방도 위의 초록색 표지판에는 '고구려대학' '다시'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과거로 시간 여행이라도 하는 듯 고구려라는 고대 국가가 있던 그 시절로 회귀하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멀리에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드라마 <주몽>을 찍은 세트장이 보였고, 수풀의 맑음과 깊음이 남달라 '청림靑林 마을'이라고도 불렸다는 다시면은 동화 속에 나오는 신령한 마을 같았다. 그리고 샛골의 직녀, 노진남 장인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다시가 원래 샛골 고장이야. 거시기 예전에는 샛골 세목이라 불렀어. 지금도 이북이나 일본이나 대만에 가서 '샛골 세목'이라 하면 알 거야. '나이'라고 하면 몰라. '나이'는 새로 만든 말이야." '나이'가 길쌈이라는 뜻이라고 노진남 장인의 남편인 최석보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아버지의 어머니인 고 김만애 장인이 며느리인 노진남 장인에 앞서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그가 별세하면서 지정이 해제되었다가 1990노진남 장인이 다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나는 계속 베를 짜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지정이 없어졌었어. 그러다 다시 받았어." 장인의 얼굴에는 시연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가만히 있을 때나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큰 애기들이 이걸 짜지 못하면 시집을 못 갔어." 장인은 손바늘 솜씨가 남다르던 어머니 아래서 베 짜기를 배웠다. 장인의 아버지는 '다시 사는 우체국 총각'을 점찍어 그녀를 함평에서 나주로 시집보냈다. 1953년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다시까지 와서 세 번인가 거듭거듭 보고 결정했어. 직장도 있고, 키도 크고, 그 이상 더 예쁜 총각이 없다는 거야. 어린 속알지로 예쁘다는 소리가 좀 들리더라고. 결혼해서는 고생 많이 했지."

 

노진남 장인이 무명베로 만든 옷 한 벌과 비단으로 만든 옷 한 벌을 지어 가지고 다시로 오게 된 사연의 시작이다. 남편을 처음 봤을 때 어땠냐고 묻자 장인은 쑥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쁘다는 것 인정하고. 젊어서는 얼굴도 겁나게 희고, 쪽 빠졌었어." 장인과 그의 남편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말을 이었다.

 

"고생 퍽시게 했어." 장인의 남편은 한국전쟁에 징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망 다녔고, 장인은 밤마다 베를 짰다. 최석보 씨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우체국을 그만둔 이후로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한때는 열넷이나 되던 식구를 모두 장인이 무명베를 짜서 먹여 살렸다.

 

장인을 나주 직녀라 부르는 것이 과장이 아닌 이유다. 한창때의 노진남 장인은 이틀에 베 한 필을 짰다. 베 한 필로는 여름 옷 한 벌을 해 입을 수 있고, 두루마기 같은 옷을 만들려면 세 필이 필요하다. 요새 장인은 베를 많이 짜지 않는다. 베를 짜는 것이 대단히 고된 노동이어서이기도 하지만, 짜도 팔 데가 없기 때문이다. "더러 누가 사자고는 해. 그런데 인건비가 안 맞아. 날짜를 많이 먹는데, 그렇게는 안 쳐주잖아. 구경은 많이 오더만."

 

샛골나이 노진남에게 왜 평생 베를 짰냐고 물었다. 장인은 여전히 웃으며 한마디로 답했다. "물레를 끊으면 우환 끓는다고 했어." 그리고 시집오기 전부터 해 오던 일을 할 뿐이라고 했다.

 

장인은 베가 팔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가 생긴 뒤로 솜이불이 필요가 없어져 버렸잖아. 옷도 나일론이 있응께 이런 거 필요 없어져 부렸고."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 노구의 몸으로 감당하기에 베틀은 거대하고도 녹록치 않았다. 장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북을 좌우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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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앗기

 

수확한 목화를 햇볕에 5일 정도 말린 후 씨 앗기를 한다. 습기가 남아 있으면 씨앗이 잘 빠지지 않으므로, 일단 목화를 볕에 잘 말려야 한다.

 

 

 

 

 

 

솜 타기

 

엉켜 있는 목화 덩어리를 활줄에 걸어 줄을 튕기는 꼭두말로 튕긴다. 꼭두말이 활줄에 진동을 일으키며 솜이 덩글덩글하게 타진다. 꼭두말을 당기면 뭉쳐진 솜덩어리가 뭉게구름처럼 하나하나 피어난다.

 

 

 

 

 

 

 

고치 말기

 

솜타기를 한 솜을 고치 말판에 놓고 말대로 말아 고치를 만든다. 솜을 가늘고 길게 말아야 실 잣기를 할 때 실도 잘 자아지고 고루 잘 뽑혀 나온다. 고치를 말고 나면 고치 말대를 빼낸다.

 

 

 

 

 

 

실 뽑기

 

물레에서 실을 잣아 만든 동그란 뭉치를 무명덩이라 하는데, 열 개의 무명덩이를 날꼬정이에 꽂아 고무대에 끼워 실을 뽑는다. 열 개의 무명덩이에서 열 올의 실을 모아 잡아 쥐어 실을 뽑는데, 이것을 '한 모습'이라 한다.

 

 

 

 

 

 

 

바디와 바디집

 

바디는 피륙을 짤 때 실을 꿰어 날을 고르기 위한 기구이다. 바디를 끼우는 테, 홈이 있는 두 짝의 나무를 '바디집'이라 한다.

 

 

 

 

 

 

 

 

바디를 바디집에 끼운 후, 베틀 사이로 실 꾸리가 담긴 북을 넣어 좌우로 왕복하며 베를 짜는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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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베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하지 무렵 종자로 쓸 목화씨를 가려내 오줌을 붓고 재를 섞어 잘 비빈다. 음력 7월 보름께면 목화꽃이 피는데, 개화 후 수일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면서 다래가 맺힌다. 다래가 맺힌 후 한 달 정도 지나면 다래가 벌어져 목화가 피는데, 첫 번째 잘된 것을 골라 수확한 것으로 실을 자아야 세목을 짤 수 있다. 이것을 맏물이라 한다.

 

수확한 목화의 씨앗을 빼는 '씨 앗기'를 한다. 씨 앗기 한 목화를 다시 햇볕에 말려, 활줄에 대고 줄을 튕기는 꼭두말을 걸어 목화를 부풀린다. '솜 타기'의 과정이다. 솜 타기 한 솜을 말판에 놓고 말대로 마는 것을 '고치 말기'라 한다.

 

그리고 물레에 고치를 말아 실 잣기를 한다. 실 잣기 한 것을 '무명덩이'라 하는데 열 개의 무명덩이를 날꼬정이에 꽂아 고무대에 끼워 실을 뽑는다. 이것을 길이를 결정하는 베날기를 하고, 베날기를 한 날실 꾸러미를 쌀 풀물에 삶는데 실을 질겨지게 하기 위함이다.

 

바디 구멍에 실을 꿴 후 베메기도투마리에 벱뎅이(베덩어리)를 끼워가며 돌려 감는다를 하고, 이것을 도투마리베를 짤 때 날을 감는 틀에 걸어 무명베를 짠다. 베를 짠 후 잿물을 받아 다시 한 번 삶는데, 무명베를 하얗게 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것을 말린 후 다듬이질 해 풀을 먹이면, 비로소 고단한 베 짜는 과정이 끝난다.

 

 

노진남

1932년 함평에서 태어나 1953년 샛골지금의 다시면로 시집와 삼대째 나주 샛골나이의 명맥을 잇고 있다.

1990년 10월 10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동서 김홍남과 며느리 원경희가 각각 조교와 전수자로 샛골나이의 업을 계승하고 있다.

 

<국립국어원 소식지 쉼표,마침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