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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여행기

대한민국 나주의 가을하늘입니다

by 호호^.^아줌마 2011. 9. 30.

당신은 살면서 스스로 무릎 꿇고 복종하고 싶은 대상이 있습니까?

2011년 9월 27일 오후 나주시 오량동  국가지정 사적 제456호 오량동 토기요지 발굴현장에서 바라본 하늘입니다.

정말 무릎 꿇고 싶은 위엄과 아름다움 아닌가요?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도종환


음악에 압도 되어 버리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음악이 너무 가슴에 사무쳐 볼륨을 최대한 높여 놓고 그 음악에 무릎 꿇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깃발 위에 백기를 달아 노래 앞에 투항하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음악에 항복을 하고 처분만 기다리고 싶은 저녁이 있습니다.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고 너무 발버둥치며 살아왔습니다. 너무 긴장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비굴하지 않게 살아야 하지만 너무 지지 않으려고만 하다보니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제 피붙이한테도 지지 않으려고 하며 삽니다. 지면 좀 어떻습니까. 사람 사는 일이 이겼다 졌다 하면서 사는 건데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 강박에서 나를 풀어주고 싶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지고 싶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음악에 지고 싶습니다. 돈이 아니라 눈물나게 아름다운 풍경에 무릎 꿇고 싶습니다. 선연하게 빛나는 초사흘 달에게 항복하고 싶습니다. 침엽수 사이로 뜨는 초사흘달, 그 옆을 따르는 별의 무리에 섞여 나도 달의 부하, 별의 졸병이 되어 따라다니고 싶습니다. 낫날같이 푸른 달이 시키는 대로 낙엽송 뒤에 가 줄 서고 싶습니다. 거기서 별들을 따라 밤하늘에 달배, 별배를 띄우고 별에 매달려 아주 천천히 떠나는 여행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사랑에 압도당하고 싶습니다. 눈이 부시는 사랑, 가슴이 벅차서 거기서 정지해 버리는 사랑, 그런 사랑에 무릎 꿇고 싶습니다. 진눈깨비 같은 눈물을 뿌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눈발에 포위당하고 싶습니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하는 눈 속에 갇히고 싶습니다. 허벅지 까지 쌓인 눈 속에 고립되어 있고 싶습니다. 구조신호를 기다리며 눈 속에 파묻혀 있고 싶습니다.

 

 


 

나는 그 동안 너무 알맞게 익기만을 기다리는 빵이었습니다. 적당한 온도에서 구워지기만을 기다리는 가마 속의 그릇이었습니다. 알맞고 적당한 온도에 길들여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븐 같은 공간, 가마 같은 세상에 갇힌 지 오래 되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산산조각 깨어지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버림 받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수없이 깨지지 않고, 망치에 얻어맞아 버려지지 않고 어떻게 품격 있는 도기가 된단 말입니까. 접시 하나도 한계온도까지 갔다 오고 나서야 온전한 그릇이 됩니다. 나는 거기까지 갔을까요. 도전하는 마음을 슬그머니 버리고 살아온 건 아닌지요. 적당히 얻은 뒤부터는 나를 방어하는 일에만 길들여진 건 아닌지요. 처음 가졌던 마음을 숨겨놓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배고프고 막막하던 때 내가 했던 약속을 버린 건 아닌지요. 자꾸 자기를 합리화 하려고만 하고 그럴듯하게 변명하는 기술만 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가난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정직하고 순수했던 눈빛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적당한 행복의 품에 갇혀 길들여지면서 그것들을 잃어가고 있다면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곳이 그 의자, 그 안방이 아니었다면 털고 일어서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어떻게 우주까지 날아갈 수 있습니까. 제 목청의 가장 높은 소리를 넘어서지 않고 어떻게 득음할 수 있습니까. 소리의 끝을 넘어가고자 피 터지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생에 몇 번, 아니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목소리가 폭포를 넘어가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안전선 밖에만 서 있었습니다. 너무 정해진 선 안으로만 걸어왔습니다. 그 안온함에 길들여진 채 안심하던 내 발걸음, 그 안도하는 표정과 웃음을 버리는 날이 하루쯤은 있어야 합니다. 그 날 그 자리에 사무치는 음악, 꽁꽁 언 별들이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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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vinsky : Three Movements from Petrouchka-2 Evgeny Kiss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