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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이야기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노명호 지음/지식산업사

by 호호^.^아줌마 2012. 4. 15.

고려태조 왕건의 동상<한겨레 기사>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노명호 지음/지식산업사·3만5000원

 

1992년 개성에서 발굴되어
역사학자를 혼란에 빠뜨린
등신대 나체 청동상
남한의 역사학자가 동상의
비밀과 고려 황제제도의
고구려 문화전통 밝히는 과정이
추리소설처럼 그려져

 

  #1. 1992년 10월 개성,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을 개축하려 봉분 북쪽을 파던 굴삭기 삽에 청동상이 걸려 나왔다. 13일 뒤 평양에서 온 학자들은 당황했다.

동상은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었다. 원래 청동박편과 금도금 파편도 붙어 있었지만 학자들이 오기 전 씻어내는 바람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등신대 청동상이 나체였던 점이었다. 좁은 어깨에 초콜렛 복근은커녕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온 몸매. 고추를 드러낸 나신에 어울리지 않게 양손을 얌전히 마주잡은 모습으로 근사한 관을 쓰고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다.

박물관으로 옮겨진 동상의 정체는 불상으로 여겨지다 몇 년 뒤 왕건의 동상으로 여겨져 북한 국보로 지정됐다.

 

  #2. 1983년 초여름 서울, 젊은 국사학자는 고려말~조선초 나주의 일지인 <금성일기>의 조선 세종 시기 기록에서 고려 2대왕 혜종의 소상이 나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졌다는 내용을 읽었다.

실마리를 좇아 <세종실록>을 보니 혜종의 소상과 함께 왕건의 조각상도 현릉 어딘가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4년 뒤인 1997년 한 신문에 실린 북한의 ‘청동불상’ 사진을 보고 왕건 동상임을 확신한 그는 2004년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과 문화적 배경’이란 논문을 썼다.

그리고 2005년, 남북학술토론회 일원으로 개성에 가서 실물을 확인한 그는 이듬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평양에서 온 국보들’ 전시회에 온 동상을 비로소 실측하게 됐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은 서울대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가 왕건 동상과 30년 넘게 이어온 인연의 매듭이자, 남북 역사학자들이 합심하여 이룬 연구의 열매다.

지은이는 나체의 등신대 동상이 현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 속에는 조선시대 학자들이 사대명분론적 시각으로 걸러내면서 사라지거나 잊혀진 고려의 황제제도와 늠름한 고구려 문화전통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동상에 담긴 숨겨진 의미를 밝히고 수백년 동안 땅속에 묻힌 사연을 추적해, 추리소설처럼 읽힌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전신 정

■ 근엄한 왕은 어째서 벌거벗고 있을까

 

본래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게 정답. 지은이는 <고려사>의 신종 6년 9월 부분 “최충헌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진전에 (모셔진 태조의 주상에) 제사하고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는 기록과 출토 당시 표면에 비단조각이 붙어 있었고 옥대가 함께 출토된 점에서 태조 동상이 나신이 아니라 옷을 입고 옥띠를 두른 상태였음을 논증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과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개경의 숭산신이나 동명왕, 동명왕의 성모인 유화의 신상도 옷을 입히는 양식이었음을 환기하며, 태조 동상의 조성과 숭배는 고려의 옛 고구려 지역에서 보이는 고구려 토속신앙과 맥을 같이한다고 밝힌다. 귀바퀴와 손가락 틈에 남은 연한 핑크색 안료 역시 전신 또는 노출부위를 살색으로 도색했다는 증거다.

 

 ■ 머리의 관에 담긴 의미

눈길이 가는 것은 머리의 관. 지은이는 그것이 진시황이 썼던 ‘통천관’과 같은 것임을 밝혀 고려가 황제의 나라를 자처한 것과 연결시킨다. 정면의 오각형은 신성한 산을 상징하는 ‘금박산’이며 그 중앙에는 금박으로 장식한 매미문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좌우의 뿔은 내관과 외관을 연결해 고정하는 무소뿔 비녀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내관 위쪽 8개의 동그란 모양은 해와 달처럼 팔방을 비추는 황제국 고려 초대군주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동상 조성 시기도 맞아떨어진다. 광종은 951년에 태조의 원찰인 봉은사를 창건한다.

 

지은이는 이때 태조의 진전(영정 또는 동상을 모신 전각)을 건축하면서 동상을 조성했다고 본다. 노비안검법, 과거제 등으로 군주권을 굳힌 광종이 태조 존숭사업을 펼친 것은 일맥상통하며 제작기법이 고려초의 불상과 흡사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 길이 ‘아기 고추’에 감춰진 비밀

지은이는 마음장상(馬陰藏相), 즉 전생에 몸을 삼가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기가 말의 그것처럼 오므라들어 몸 안에 숨어 있는 모양을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국시대만 해도 군왕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기를 강조했지만 고려에 들어 내면적 신성한 힘을 갖춘 존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볼록한 배 역시 오랜 단전호흡과 연결시키며, 발바닥이 평평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길고 가늘며, 복숭아뼈가 밋밋한 것 등은 부처 또는 전륜성왕의 서른 두 가지 길상과 통한다고 본다.

 

  ■ 왜 동상은 버려지듯 묻혔을까

 

고려 당시 황제 동상은 태평기에는 연등회 행렬의 종착지였고, 전란시에는 강화도행 어가행렬과 함께 했던 보물이었다. 이 동상이 능 귀퉁이에 버려지다시피 묻혔던 이유는?

 

지은이는 조선 초기의 고려왕조 말살정책을 지목한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부터 봉은사 왕건의 동상을 마전군(경기도 연천군 마산면 아미리)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태종대까지 고려 왕실의 일족을 모조리 찾아내 죽였다.

 

세종대에는 고려왕의 제사 대상이 황제국처럼 8위이던 것을 바꾸어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네 왕만을 제향토록 했다. 제후국을 자처하는 조선의 5묘제보다 격을 낮춘 것이다. 세종은 태조의 동상을 다른 왕들처럼 위판으로 교체하면서 동상을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겼다가 11년 정월에 다시 끌어올려 개성의 왕릉 구석에 파묻게 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