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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임을 위한 행진곡’과 민중가요의 역사

by 호호^.^아줌마 2015. 5. 20.

‘임을 위한 행진곡’과 민중가요의 역사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1980년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던 민주화 현장에서 한목소리로 불렀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우리나라 민주화·민중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입니다. 한데 이 곡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른세 번째 5·18 기념식을 앞둔 16일 국가보훈처는 “이 노래는 일부 노동·진보 단체에서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이고, 정부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일어나 주먹을 쥐고 흔들며 노래 부르는 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있다”며 “제창이 아닌 합창단이 부르고 원하는 사람은 따라 부르는 식으로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반발한 5·18 관련 단체들은 행사에 불참하고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2003년 5·18 기념식이 정부 행사로 승격된 뒤 2008년 이명박 정부 첫해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은 본 행사에서 공식 제창됐습니다.

 

그러나 2009년 이후에는 합창이나 식전 연주곡 형태로 불렸습니다. 여기에 국가보훈처가 5·18 공식 기념곡을 만들겠다는 시도까지 드러나자 ‘임을 위한 행진곡’ 퇴출 시도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1980년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황석영 소설가가 다듬고 김종률씨가 곡을 붙였습니다.

 

5·18 당시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때 숨을 거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그의 후배로 노동자 야학 운동을 하다 1979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바쳐졌습니다.

 

광주시 운암동 황석영 소설가의 집에서 녹음을 했는데,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까 창문에 두꺼운 군용 담요를 덮어씌우기까지 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복제 테이프는 곧 전국에 퍼져나갔고 민주화 운동 현장이라면 그 어디서든 불렸습니다.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시키려는 움직임은 1979년 12·12, 1980년 5·17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와 이들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의 불편한 속내가 드러난 것입니다.

 

2000곡이 넘는 민중가요 중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화 운동 진영의 애국가’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유명합니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계몽적이고 구호에 그쳤던 이전의 노래들에 비해 기승전결의 구조에 서정성까지 갖춘 단조 행진곡으로 만들어져 이후 1980년대 민중가요의 흐름을 이끌었다”고 평가합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던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의 역량”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특별함을 찾습니다. 곡을 쓴 김종률씨는 1979년 문화방송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습니다.

 

민요와 복음성가, 외국곡의 가락을 빌려왔거나 학생들이 투박하게 만들었던 이전의 민중가요보다 음악 수준이 높았습니다. 5·18의 상징성, 뛰어난 음악성, 여운이 남는 노랫말 등 이 모든 게 들어 있는 게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교과서 펼쳐보기 | 민중문학

 

우리나라 교과서는 아직까지 민중가요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중가요는 민중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삶을 담아 스스로 향유했다는 점에서 민요와 노동요 등 민중문학과 연결됩니다. 고등학교 문학Ⅱ(천재교육 교과서)의 ‘한국문학의 범위’ 단원을 보면 우리 민족이 애창하는 민요인 아리랑의 한 종류로 ‘아리랑 타령’(96~100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 민씨의 팔촌이 되려무나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배 띄여라 노다 가세 (중략)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 집은 헐려서 정거장 되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배 띄여라 노다 가세 (하략)

 

이씨는 고종을, 민씨는 명성황후를 가리킵니다. 왕보다 외척들이 더 큰 힘을 누렸던 민씨 정권을 풍자했습니다. 조선의 산물을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신작로와 철도를 만들었던 일제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직선적이고 거침없는 표현으로 당대의 사회 현실을 민중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이처럼 민요는 민중들의 생활상과 감정, 사상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이 교과서 ‘한국문학의 역사’ 단원에서는 신경림 시인의 시 ‘농무’(244~247쪽)도 소개합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하략)

 

‘농무’란 농촌에서 일을 끝낸 다음 피로를 풀고 삶의 활력을 얻기 위해 행해지던 춤입니다. 신경림 시인은 이를 소재로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농촌 현실과 점점 피폐해지는 농민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이처럼 민중문학은 민중을 주인공으로 삼아 민중의 사상과 감정, 의사를 드러냅니다.

 

책으로 확장하기 | 그들은 어떻게 대중의 눈과 귀를 막았는가

 

노래의 파급력을 주목하고 활용한 것은 민중들만이 아닙니다. 독재자들 또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래와 음악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노래를 통해 국가에 유용한 인간형, 말하자면 순종적이고 복종적이며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력을 제조한다는 목표하에 도대체 어떤 노래를 듣고 불러야 하는가. “명랑하고 씩씩함”을 기조로 관제 주도하에 만들어진 이 노래들은 때로 ‘국민가요’라고 불리기도 했고, 때로 ‘애국가요’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건전가요’라고 불리기도 했다.”(<독재자의 노래> 252~253쪽)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 금수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불렸던 ‘잘살아보세’란 노래입니다. 지은이 송화숙은 “당시 정권은 국민 통제를 위해 노래와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밝힙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늘 애국가가 울려퍼졌고, 아침이면 집단체조를 알리는 “국민체조 시~~작, 헛, 둘, 셋, 넷”이 흘러나왔습니다.

 

점심시간 학생들은 ‘혼분식의 노래’를 들으며 밥을 먹었고, 오후 6시면 ‘일시정지’한 채로 국기하강식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세상은 온통 무언가를 지시하는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국가권력은 스스로의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국민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개조’하고 ‘통제’하는 데 음악만 한 것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은 듣고 따라 불러야 했던 ‘새마을 노래’와 ‘나의 조국’을 작사·작곡한 이는 다름 아닌 박정희이기도 했습니다.

 

국가권력이 강권했던 애국·건전가요의 반대편에는 불순하고 반국가적이라는 딱지를 받은 금지곡들도 있었습니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을 한다는 이유로, 이장희의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이유로,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습니다.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킴’은 ‘키가 작은 박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배호의 ‘0시의 이별’은 통금이 있던 시절 ‘0시에 이별하면 통행금지 위반’이라는 이유로 금지됐습니다.

 

 

논제로 정리하기 | 예술과 사회

 

한양대 2011년도 모의논술 2차(인문계)에서는 ‘예술과 사회의 올바른 관계’를 논제로 칸트와 헤겔의 미학적 관점 차이를 비교하고, 이를 종합하여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칸트는 정치나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때 예술은 비로소 예술성을 획득한다는 입장이고, 헤겔은 사회적 생산물로서 예술은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민중가요는 당대 사회의 가장 적극적인 반영물이라는 점에서 논제와 연결됩니다. 정치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한 ‘독재자의 노래’ 또한 예술과 사회의 관계 측면에서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한겨레 2013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