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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신앙

나주교회 이양재 장로와 함께 하는 신앙이야기

by 호호^.^아줌마 2009. 6. 3.

인터뷰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이양재 장로와 함께 하는 신앙이야기

 

 

 

 ‘베풀 사랑 100년’을 다짐하며 6.25의 전란 속에서도 주님 피값으로 사신 나주교회가 훼파되지 않고 든든히 이어져 오기까지 나주교회가 배출해 낸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양재 장로님을 통해 배워본다.

 

기자 : 장로님의 신앙의 경력이 궁금합니다.

■유년시절 이모님께서 교회가자는 말씀은 자주 하셨지만 신앙생활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아주 가끔 교회 앞을 지나다 보면 그냥 포근하고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나주로 이사 와서 청년 때 신앙생활을 막 시작할 즈음 6.25 전쟁이 났었죠.

 

기자 : 마음속에 심어진 믿음의 씨앗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거치면서 어떻게 성장해 갔는지요?

 ■나주는 특별히 좌익 활동이 심했고 세지의 동창양민 학살 등의 잔혹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을 정도로 아무 죄 없는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처참하게 죽어나가도 누구하나 입도 벙긋하지 못했지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하나님을 간절히 불렀지 않나 싶습니다.

 

기자 : 6.25 전란 중에 나주교회를 비롯한 교회나 교인들의 피해 상황은요?

■북한군이 나주에 입성하자 믿음을 가진 많은 성도들이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피해상황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의 몸 되신 교회가 불타거나 훼파된 곳이 한곳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주교회를 다니면서 들어보니 전란통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아주 드문 일로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은혜를 찬양하기에 충분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자 : 젊은 시절 신앙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제가 6.25 이후 군대를 가서 훈련소에서 십자가를 보았는데 어떻게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는지 모릅니다. 교회로만 달려가 예배드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달게 치를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자 : 어찌보면 그 때 이후로 계속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어린시절 이모님께서 뿌려놓으신 믿음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고 있다가 청년 때 전도를 받게 되자 아무런 거부감 없이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또 간절한 믿음이 전쟁통에 숨겨져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군 제대와 함께 본 교회를 지금까지 섬기게 된 것 같습니다.

 

기자 : 1950~60년대 당시 가장 인상 깊었던 행사나 사건사고로 기억나시는 게 있으신지요?

■전쟁이 끝난 후 그때는 전교인 야외소풍 같은 때도 여성들이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었었고 흰옷을 입은 그 모습들이 마치 천국잔치 같았습니다. 특히 산상예배나 부흥회 때면 전쟁의 폐허 속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구름떼처럼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던 그런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지금도 가슴 아픈 사건은 우리교회가 두 번에 걸쳐 분란을 겪으면서 세 교회로 나뉘는 아픔을 겪었어요. 그 첫번째 사건이 육이오(6.25) 나기 직전에 부임한 강병철 목사가 북한이 고향인 사람인데 당회와 노회에서 북에서 목회활동을 했다는 이명확인서를 받아오라고 하는데 전쟁이 나고 삼팔선이 가로막히면서 이 걸 못해 온거죠. 결국 사임을 하게 되니까 1952년 3월에 장로 두 분, 집사 세 분, 교인 몇 명이 따로 나가 남문교회를 세웠는데 지금의 나주제일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분란은 1959년도에 대전에서 교단 총회가 열렸는데 복음주의냐, 에큐메니칼 운동이냐, 이런 사상적인 논쟁이 일어나 결국 전국 교회가 둘로 쪼개지는 아픔 속에 우리교회도 분열의 비극을 겪게 된 거죠. 그때 교회를 똑같이 나눠가져야 한다면서 단상의 강대상이며, 기왓장, 벽돌까지 반반씩 하자고 교회를 완전히 쪼개서 나가 세운 교회가 나주중앙교회가 된 거고, 우리교회도 그렇게 파괴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다보니 당시 백민원 원장이던 이양례 집사가 서내동에 대지와 한옥 한 동을 희사해서 새로 지은 교회가 나주교회가 된 것입니다.

 

기자 : 그런 아픔 속에서도 우리교회가 100년의 역사를 지켜오면서 지역사회나 사회교육 발전에 기여한 자랑스러운 부분이 있다면요?

■우리교회는 6.25 전쟁 전 50년 초 부터 유치원을 운영해 오면서 나주지역의 인재양성에 힘써온 부분이랄지 근래 들어서 노인대학, 독거노인 돌봐드리기, 토요일의 사회교육센터 운영, 외국인을 위한 각종 사업과 교회 담장을 헐고 주차장을 개방하고, 도서관 시설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등의 일은 정말 가슴 뿌듯한 일입니다. 100년 전통의 성숙한 교회다운 일이지요.

 

기자 : 100년의교회 역사 속에 꼭 추천할 만한 신앙의 인물이 있으시다면요?

■단연 임순님 권사님이시지요. 거처할 곳 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환자들의 피고름을 빨아가며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에 힘쓰신 분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임 권사님을 하늘이 보낸 천사라고 불렀을 정도였지요. 60-70년대에 너 나 없이 가난한 그 시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섬겨가며 쌀 한 톨 자신의 옷가지 하나 남김없이 불쌍한 이웃들에게 먹이고 입히는 것이 그분의 삶이었습니다.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여성이었지만 그분에게는 특별한 믿음의 권세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시절 그러한 기적 같은 섬김과 돌봄의 일들이 가능했지요. 임 권사님은 나주 교회의 자랑이기도 했지만 한국교회의 자랑이 라고 하기에 충분한 분이셨습니다.

 

기자 : 장로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처럼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신앙의 선배들의 목숨을 건 눈물의 기도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막연히 100년 전통의 교회로만 알고 있던 부분들에 대한 자부심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장로님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대담.정리 김노금 권사

                                                                                             사진 김양순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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