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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 칼럼…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by 호호^.^아줌마 2010. 1. 16.

 

김현임 칼럼…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사방이 무서울 만큼 고요하고 쓸쓸하다가 ‘오솔’이라했던가. 그렇다면 오솔하기 그지없는 요즘이다. 성긴 내 대인관계가 한 원인이고 내 사는 곳의 처지가 그러하다.

 

한 달 통틀어 사람 한 사람 구경을 못할 정도로 인적 끊긴 오솔하고 오솔한 우리 마을 회진리의 동절기, 이처럼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엔 옛 책의 이런 구절이나 초록(抄錄)하며 인정(人情)의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다.

 

‘헛된 명예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해서 재사(才士)는 많은 사람과 사귀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덕을 쌓음으로서 저절로 찾아오는 벗을 기다리는 것이 성인의 길이요, 문을 걸어 닫고 바깥출입을 삼감으로써 당세에 이름 날리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달관한 선비다.’

 

눈 오는 날 뿐이랴. 은하수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꿀꺽 마른 침 삼킬 만큼 사람 향한 그리움을 감출 수 없는 날이다. 대놓고 하품을 해대는 땔감, 참외 파는 장사치들 앞에서 효제충신, 예의염치를 펼치기도 했다던가.

 

맨발에 망건을 벗은 채, 방문턱에 엉덩이를 걸치고서 행랑채의 천한 것들과 말을 나누던 중 뜻 통하는 지인의 방문이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연암 선생은 서둘러 옷매무새를 고치고 고금의 치란과 시대의 문장과 논쟁의 파별에 대해 거침없이 쏟았다. 찾아 온 이 역시도 이 어른이 집에 계실까 안 계실까 염려하다가 ‘등조언(登照焉)!’하는 감탄의 말로 불 켜 있는 스승의 방에 안도를 표했다. 

 

이 세상의 행복과 고통은 서로의 지분을 공평히 나누더라고 뜻밖의 호사다. 두 번째 책의 독자가 내 집을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들떠 허둥댄다. 국내외를 오가는 바쁜 일정, 회진 임씨 아가씨는 책 속에 등장하는 제 뿌리 마을의 호젓한 정자, 영모정의 은근한 술자리가 그리웠을까.

 

아닌 게 아니라 하필 정자 자락에 자리 잡은 집 위치로 하여 제 근거를 찾는 이들의 방문이 심심찮기도 했다. 그들을 대접하는 번거로움 보다는 뜻 통하는 지기(知己)와의 만남이 기꺼웠다. 이 한적한 절기에 머리 가득 눈모자를 뒤집어 쓴 어여쁜 처자라니! 오호라! 내 집 벽에 걸린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의 재현이다.

 

‘물은 차갑고 바람은 시리구나/누구 하나 불러와/ 이 적적함 등불 아래 시륄까.’ 시 속 정취처럼 눈에 사람 담은 지 언제던가. 맹추위에 꽁꽁 언 물로 덧친 입속 군내다. 자다가 얻어먹는 맛난 떡이더라고 벗의 반가움에 문 닫을 생각도, 들어선 지 오래인 내방객도 무거운 방한모 벗을 생각을 잊는다.

 

휘늘어진 소나무의 눈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현대판 설중방우도는 무르익는다. 잎새주와 복분자 몇 잔, 최근의 졸작을 나누어 읽으며 객의 선심성 맞장구에 기세 오른 집주인이다. 글 속 글을 읽어주지 않는 무지한 독자를 안주로 씹어대는 호기도 부린다.

 

누가 뭐래도 서로를 위해 지원사격하는 여자들이 좋다. 맞아, 맞아, 누구나 자신만의 역사 위에 선 현재를 살고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삶은 언제나 파티일 수는 없다. 우울과 낭패감 그것들과 끊임없이 협상해야하는 일상, 냉혹한 현실 직시... 이런 류로 이어지는 횡설수설... 궁촌 회진리 아짐을 불러 두 시까지 민화투를 치는 지극히 촌마을다운 마무리로 신판 설중방우도의 붓질은 완성됐다.      

 

 설중방우(雪中訪友) 


 

눈 내린 사나흘 뒤 다시면 회진리 반가(畔佳) 김현임 선생 댁을 찾았다.

글 그대로 설중방우(雪中訪友)다.

 

 

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개들이 쫄래쫄래 달려나온다.

 

 

항아리마다

눈고깔모자를 쓰고...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뒤안으로 돌아가보니

무쇠솥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은근하게 타오르는 장작불.

확 타올랐다 금새 스르르 꺼져버리는

청춘의 불꽃과는 사뭇 다른

은근한 불꽃을 피워내고 있다.

 

 

마당 한켠에서 짭조름고소한 구이냄새가 코끝을 간지른다.

와~~

키조개 구이다.

 

 

이 댁의 단골 김오수 선생이

남광주시장에서 사왔다는 키조개가 마침 익어가는 중이다.

 

 

선생은 풀풀 끓어오른 매주콩을 퍼내고 있다.

음~ 고소한 게

어릴적 메주콩 쑤는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냉큼냉큼 집어먹던 그 콩이다.

그 맛을 그리워한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주인장이

바가지에 절반이나 담아 건네준다.

 

 

동네에서 직접 수확한 콩을 삶았으니

장에서 산 자칫했다간 원산지불명의 그런 콩맛과는 다른 맛이다.

 

 

동네아짐들까지 이 댁의 메주쑤기를 거들고 나섰다.

 

 

반가의 목련나무는 눈꽃을 피운 채

또 다른 꽃망울을 잉태하고 있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미소를 머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