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림이야기

광주시립미술관 '예향 · 용곡예가전'

by 호호^.^아줌마 2010. 3. 2.

 

  광주시립미술관 '예향·용곡예가전'

 

ㆍ기    간 : 2010.02.09 ∼ 2010.03.21

ㆍ작 품 수 : 서예, 한국화, 도자기, 사진 60여점

ㆍ전시장소 : 광주시립미술관 본관 제3, 4전시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박지택)이 2010년 새해를 맞아 예향 남도의 문화·예술적 정체성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예술 가문을 소개하는 예향전을 기획전시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마련된 '예향·용곡예가전'은 나주시 남평읍에 용곡예가를 이루고 사는 조기동 선생의 평생에 걸친 작품에 자제들이 함께한 전시로 용곡 선생의 남도 동국진체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서예는 단순한 글자가 아닌 정신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양 예술의 하나로 남도는 동국진체 전통을 계승하였다.

 

용곡 선생은 옥동 이서에 시작하여 원교 이광사, 송곡 안규동 선생으로 이어지는 남도 동국진체의 대맥을 이어 남도 서예 발전에 기여했다.

 

평생 붓과 더불어 살아온 행초서에 능한 원로서예가이자 문필가로 생명력이 넘치는 필선은 인성과 품성을 표출하여 남도 서예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셨다.

 

조영랑 ‘유채꽃(2010)’

 


용곡 선생은 한자 서예 기본서법, 유공권 서법첩, 서예 신지도법 교본 등의 저서를 발간하며 전통적인 서법을 전승하였고 1960년 10월에 용곡서예연구원을 설립하여 만 명 이상의 제자들을 길러내어 남도 서예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제자들은 국전 등을 통해 명성을 얻어 명실상부한 남도 서예의 명문 서가를 이루어 남도 동국진체 전통의 큰 맥으로 남아있다.

 

용곡 선생은 서(書)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자 청정한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이라며 인격도야를 중시했다. 서예를 통해 제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에 전라남도로부터 20세기를 빛낸 학원인대상을 수상했다.

↗ 조진호 ‘나의 아버지2(2010)’

       

용곡 가족은 모두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용곡예가라 부른다.

장남 조재호는 도예가로 은은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특유의 질감으로 조형성을 살린 작품으로 미국, 중국 등 외국에서 수차례 작품전을 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장녀인 조정아는 한국화로 불교 문양을 모티브로 활용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둘째 딸인 조영랑은 문인화를, 셋째 딸인 조화영은 서예를 한다. 넷째 딸인 조성옥은 도예가로 불화와 분청사기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막내인 조진호는 사진작가이며 광고사진 부문에서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을 많이 제작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남도 서예의 대가 용곡 조기동선생의 문자향·서권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용곡의 예술 혼을 이어받아 작업을 펼치고 있는 용곡예가 가족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동국진체(東國眞體)


18세기 민족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가장 한국적인 서풍인 동국진체가 출현하였다. 이서와 공재 윤두서로부터 시작된 서체는 자유분방한 필치에 해학과 여유를 내재시키는 형상성을 추구하였으며 윤순을 거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광사의 동국진체는 특히 남도지방의 선승들에게 이어져 혜장 등 필명 높은 선승들을 탄생시켰다. 일제시대 이후, 허백련, 손재형, 황현, 구철우, 안규동에 전해져 남도의 서예를 풍부하게 하였다. 안규동의 동국진체는 조기동, 이돈흥, 이규형 등에 이어져 동국진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용곡예가


용곡 조기동 가족은 예향 남도에서 손꼽히는 예술 가문으로 용곡예가라 부른다. 용곡의 가족 구성원 모두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예술인으로 아버지의 예술 혼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1989년부터 시작된 가족작품전시회는 용곡과 6남매가 한자리에 모여 가족사랑이라는 테마로 이끄는 전시회이다. 가족작품전시회는 국내에서 유래가 없는 전시로 예술 혼으로 가득 찬 용곡예가 구성원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용곡예가는 예술 가문을 지칭하는 이외에 공방, 미술관을 말한다. 용곡은 1997년에 나주 남평읍에 용곡예가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용곡은 서예학원, 조재호는 도예공방, 조진호는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가족들의 작업공간이 함께 있는 용곡예가는 용곡과 여섯 자녀들의 글씨와 그림 그리고 도예작품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미술관이다.


용곡의 서예와 삶

장석원(미술평론가)

 

‘도처청풍(到處淸風)’.


맑은 바람이 도처에서 불고 지나가듯이 서법 역시 도처청풍이다. 그것을 구하고 익히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곳마다 의미 있는 것이 형성된다. 일생을 바쳐서 서법을 구하고 의심없이, 일관되게 한 길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서도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다.


용곡(龍谷) 조기동(曺基銅)은 일생 서예 한 길을 외골수로 걸어온 예인이다. 1960년대에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을 스승으로 만나면서 길을 닦게 되었고 그 후 일관되게 서예가의 길을 정진하면서 열심히 작업해 왔다. 그의 작품에서 이는 바르고 곧으며 정성스러운 기운은 평생 수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80 초반의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작업에 집중하는 일을 쉬지 않는 그의 생활은 곧 그의 작품에 내재되는 기운의 근거가 된다. 그의 스승 송곡은 ‘붓에 먹물이 아닌 맹물을 묻혀 마루판에다 물 글씨를 쓰고 마른 걸레로 지워서 다시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쓰고…, 이러한 마루판이 세 번이나 썩어 내릴’ 정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송곡이 강조했던 수업 지침 역시 "비법이란 다른 게 없고요 그저 부지런히 쓰는 것이 법입니다. 비법이에요. 그리고 글씨란 것은 작가가 되어 작품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때를 가리는 것이지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장소도 시간도 없어요. 얼마든지 그저 쓰고 싶은대로 써야 합니다"고 말했듯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서사(書寫) 수련이었다.

 

용곡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서 여러 법첩을 익혔지만 그중 당(唐)의 손과정 서보(孫過庭 書譜)를 많이 공부했고 그 후에는 송(宋)의 황산곡(黃山谷)을 익힌 것으로 알려졌다. 80년대 후반의 작업으로 증심사 입구의 ‘무등산 증심사(無等山 證心寺)’ 글씨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용곡의 스승 송곡은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62-1723),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 1798-1879), 기초 모수명(箕樵 牟受明) 뒤로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과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등으로 계승되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맥을 잇고 있다.

 

송곡이 설주의 직계 제자로서 맥을 이었던 것이다. 동국진체는 조선 후기에 일기 시작한 조선적 서법을 말하며 중국 법첩의 범주를 벗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등장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매우 중요한 자각적 예술 운동이었다. 그 중에서도 1762년에 신지도로 23년간 유배되면서 자신의 원교체를 완성했다는 이광사나 벼루를 3개나 구멍을 낼 정도로 글씨를 썼다는 이삼만이 대표적이다.

 

동국진체가 호남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근대 이후에는 광주에 뿌리박게 되었다는 것은 지역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광주 문빈정사에 세워진 송곡의 기적비 제막식 즈음에 용곡은 추모하기를, ‘…물위금일불학이내일勿爲今日不學而來日하라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교훈적인 글을 제자에게 써주신 작품이 아직까지 나의 개인 서예실 벽에 걸려 있어 그때 기억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고 언급하고 있다.


용곡 조기동은 전남 화순 북면 용곡리 태생이다. 조부는 소학교를 세웠지만 그후 재산을 몰수당해 용곡은 소학교 시절부터 고초를 겪었다. 부친은 면장을 지냈으며 이때 각종의 공문서의 표지에 쓰인 글씨에 아름다움을 느꼈으며 또 소학교 시절 교장(김대연)의 판서 글씨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소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서 합격하여 면사무소에 근무하다가 역시 독학으로 교원시험을 봐서 합격하여 6·25 전에 강습까지 받었다. 살아야 했으므로 전쟁 직후에는 부기, 주산도 배웠다. 1960년에는 국제펜글씨학원을 설립, 경영하는 한편 서예에 집중하게 된다. 이 때에 취죽 송태학의 한문 서당을 다니는 한편 송곡을 만나 서예를 배우게 되는데, 스승은 ‘재주가 있으니 열심히 해서 모범이 되어라’라고 격려 했다고 한다.

 

이후 전남도전과 국전에 출품케 되는데 1973년부터 1983년까지 국전에서 계속 입, 특선을 하여 인정을 받는다. 국전이 끝나고 열린 1986년의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전에 지역 서예가로서는 학정(鶴亭)과 용곡 두 사람 만이 뽑히는 영예를 안았다.


어릴 적부터 사찰의 장엄함과 적막을 깨는 풍경 소리를 좋아했다는 용곡은 50이 넘어서부터는 증심사, 금광사, 삼광사(부산)의 현판 및 주련 글씨를 많이 썼다. 서도에 정진 중 잡념을 떨칠 수 없을 때에 관세음보살을 염송해 망상을 떨치고 전념할 수 있었다는 그는 주련이나 현판 휘호 작업을 할 때에는 반드시 목욕 정제 후 반야심경을 암송하고서야 붓을 들었다.

 

그는 "…글씨에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서도의 기본은 바로 불자의 입문과도 같다. 욕심과 분노를 버릴 때 성성한 글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용곡은 40년 가까이 용곡서예원을 운영하며 제자들을 키워 왔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제자가 1만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용연회 전시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집약해 왔는데, 30회 가까이 지속하고 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광주지역 청소년 선도위원으로 위촉받아 청소년 심성 순화를 위한 서예, 예절 교육을 지도 해왔다. 불우 청소년에게 가훈 제작을 지원해 탈선을 예방하는데에 서예가 유효했다. 자녀들 6명이 모두 예술의 길에 들어 섰는데 이중 3명이 서예, 도예, 사진으로 심리치료에 열중하는 것은 역시 예술을 통하여 어둡고 불우한 여건을 치유하려는 부전자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제들은 성장 과정에서 모두 서예 학습을 받았는데, 장남 조재호는 부친의 서예원에 공부하다가 용변이 급하여 무심코 연습용 종이를 사용했는데, 이를 발견한 부친은 종이 뭉치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도록 하더니 모두 불태우라고 하여 놀라고 망설였다.

 

그러자 부친은 손수 이를 불태우면서 서예인으로 생명과 같이 아껴야 할 종이를 그릇되게 사용했다며 예술가로서의 정신적 자세를 깨우쳤다. 그 후 조재호는 도예가로서 성장하면서 부친의 정신적 가르침을 중시하게 되었다.

 

← 조재호 ‘흔적(2009)’


차남 조진호는 사진을 배워 시골 동네의 어른들 영정 사진들을 무료로 촬영해 주어 시선을 끌었다. 영정 사진이라는 개념이 좀 거슬리자 장수 사진으로 이름을 바꾸어 한동안 작업을 계속했다. 이즈음에는 사진으로 과거의 기억과 관련된 이미지 추적, 사진 제작 등으로 심리 치료를 시행하는데 이 분야의 개척 단계라고 한다.


장녀 조정아는 한국화를 전공하여 전통적 소재의 테마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하여 광주시전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조정아 ‘아침바람 건 듯 불고 새벽달 은하네(2009)’

 

차녀 조영랑은 서예가로서 국전 입선, 대한민국 서예대전 특선을 했고 수 십 년간 장흥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재소자들에게 서예를 지도해왔다.

 

3녀 조화영은 서예가로서 전남도전, 광주시전, 무등미술대전 등에서 입상하고 용연회에서 활동 중이다. 4녀 조성옥은 한국화, 도예를 전공하고 도예로서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유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이후 용곡 일가는 나주시 남평읍 수원리에 용곡 예가를 짓고 이주하여 살고 있다.

 

서예, 도예, 사진, 한국화 등 작업 공간이 마련된 이곳은 용곡이 길러낸 자제들의 종합예술공간이다. 1200도가 넘는 온도에서 현대적 취향의 작품이 생산되는가 하면, 사진 제작 및 인화, 편집이 가능한 스튜디오, 언제나 고즈넉한 묵향이 배인 용곡 서예의 산실이 구비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백아산 기슭의 오지에서 태어나 서예에 심취하고 자수성가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용곡의 일생은 예술가로서 일가를 이루며 바르고 곧고 강직한 기풍을 발하고 있다. 자제들 또한 용곡의 기풍을 이어받아 다양한 작업들을 펼치면서 예술과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일생을 통한 예술적 궤적은 예술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는 고귀함을 갖는다. 난관을 이겨내면서 올곧게 살아 온 한 서예가의 진실이 거기 있다.

 


예향-용곡예가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윤익

 

전라도의 중심도시인 광주는 예로부터 예향이다. 무등산이 양팔을 벌려 감싸 안은 듯한 시가지 어디를 가나 예술적 문화유산이 가득하며 그로인해 예술의 향기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는 무등산을 넘으면 조선시대 가사문화를 꽃피웠던 담양땅 인데 그곳에는 소쇄원, 식영정, 명옥헌, 송강정 등 오래된 원림과 정자가 많으며 사시사철 언제 찾아가도 고풍스러운 예술적 분위기가 일품이다.

 

호남지역의 곳곳에 산재한 전통원림과 정자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묵객들의 자취가 지금도 또렷하다. 이러한 전통에서부터 유래한 예술적 정신이 오늘날에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또 다른 담론을 생산하는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디자인비엔날레, 국제공연예술제 그리고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선포한 이후 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주목받을 만한 굵직한 사업들로 전승되어 새로운 의미의“예향광주”의 이미지로 세계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다.

 

경인년 새해에도 광주의 문화예술계는 매우 능동적인 자세로 풍성한 사업을 계획 중이며 전국에서 가장 먼저 개관한 지역의 공립미술관인 시립미술관은 올해로 18주년이 되고 국제적 미술행사로 자리 잡은 광주비엔날레는 8회를 맞이한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의 위상에 부합하는 많은 문화예술사업들이 점차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지역미술관이지만 공간적으로 많이 발전하여 이제는 국제적으로 전혀 손색없는 전시공간들을 확보하였다. 앞으로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 다양하고 깊이 있는 기획으로 우리미술관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타 국공립미술관들과의 차별성을 통한 미술관의 정체성확립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오늘의 새롭고 진정한 예향광주를 우리 자신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광주가 어떠한 이유로 예향이라고 불리는지 알아 보아야한다. 가장 가시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전통적으로 유난히 많은 예술인구가 이 지역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광주의 수많은 문화예술인중 미술인은 다수에 해당하고 예향광주에 살며 예술을 업으로 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은 예술적 정신을 자손들에게 지도하며 예술인의 삶을 사는 것을 커다란 가치로 생각한다. 각박하고 실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예술적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하며 청빈하고 아름다우며 바르게 사는 예가를 이룬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화의 허백련, 서양화의 오지호 가문이 존재한다.


이러한 연유로 광주시립미술관은 2010년 새해를 맞이하여 또 하나의 예향예가를 소개하며 예향광주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 하고자한다.

 

← 조성옥 ‘염원2(2010)’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길목의 남평에 위치한 용곡예가는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명문예가중의 하나이다. 오백 여 평에 이르는 드넓은 대지에 용곡서예연구원을 비롯하여 커다란 가마가 설치된 도예작업장과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된 사진작업을 하는 사진스튜디오가 조화롭게 자리 잡아 그 누가 보아도 한눈에 이곳이 예술가들의 삶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곳이 바로 용곡 조기동 선생이 그 자신의 예술적 노년을 불사르며 그의 자제들과 함께 작품을 하는 살아 숨쉬는 문화공간이다. 그가 키워낸 육남매 모두가 예술가이며 학자로서 그들 자신도 작품을 쉼 없이 하는 작가이며 후학을 지도하는 교육자들이다.


용곡예가를 세운 용곡 조기동 선생은 1929년 화순군 북면 용곡리 조중환의 4남으로 태어나 조상 때부터 유교적 가풍의 뿌리를 잇는 가문에서 자랐으며 일평생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로 후진양성과 서예활동에만 전념해온 원로 서예가이다.

 

1960년 10월에 광주에 용곡서예원을 개원하여 일만 명 이상의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한자 서예 기본서법, 유공권 서법첩, 서예 신지도법 교본 등의 저서를 발간하며 정통적인 서법연구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예는 인격을 도야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품격 높은 예술로서 글쓴이의 마음가짐이 정갈해야만 최고의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서(書)는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글씨만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지요. 그래서 글씨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자 마음을 청정한 상태로 되돌려 주는 수련의 과정이기도 하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글씨를 통해서 삶의 풍상을 이겨내고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곤 했지요”이처럼 서예는 예술의 한 분야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정신과 인생을 사는 지혜가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그는 이러한 예술적 정신을 엄하며 자상하게 그의 자제들에게 전수하였다. 가훈도 고 의재 허백련 화백이 내려준 시예전가(詩禮傳家) 로서 글과 예의가 전해 내려오는 가문이라는 뜻이다.


용곡선생은 가족들에게 어느 한사람의 실수로 가족 명예가 실추되지 않게끔 가정과 사회에 모범이 되길 강조했으며 자제들은 청출어람 이라는 말을 언제나 생각하며 가족의 정과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예술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아버지이며 스승이신 용곡선생의 존재는 몸을 낳아주시고 정신을 만들어 다듬는 것을 가르침과 본보기를 통하여 몸소 행하신 참으로 닮고 싶은 예술인이다.

 

그리하여 용곡예가의 장남 재호씨는 도예가이며 장녀 정아씨는 한국화가이고 차녀 영랑씨와 삼녀 화영씨는 서예를 전공하며 사녀 성옥은 한국화와 도예를 결합하는 작품을 하고 막내 진호씨는 사진을 전공한다. 그들 사이에는 가족의 정을 넘어서는 한없는 애정과 신뢰가 예술혼과 더불어 형성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차녀 영랑씨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아버님과 어머님이다. 지금까지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드리시는 부모님의 음성이 풍경과도 같아 부모님을 상징하는 의미로 “풍경소리와 연꽃”이라는 작품을 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맑고 청아한 풍경소리와 같이 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셨고, 어머님께서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아버님을 비롯하여 우리 6남매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과 희생으로 훌륭한 예술가를 만들어주신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언급한다.

 

용곡예가는 그 가족들이 모두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로인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하여 예술의 향기를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로서 용곡예가의 존재는 진정하게 빛고을 광주가 예향으로 불리는 많은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서애(西厓) 유성룡 선생의 시를 용곡 조기동 선생(↑)과 딸 조화영(←)이 쓰다

 

 齊居有懷

                                       

細雨孤村暮  寒江落木秋  

壁重嵐翠積  天遠雁聲流 

學道無全力  臨岐有晩愁 

都將經濟業  歸臥水雲추

  

가랑비 내리는 마을 외로이 날은 저물고

스산한 강물 흐르고 낙엽지는 가을.

첩첩한 산중 비취빛으로 쌓였는데

하늘 저 멀리 기러기 울며 나는도다.

도를 배움에 전력하지 못하였음에

갈림길에 서서 때늦은 근심 있나니.

모두 장차 경세제민을 위한 일이었음이라

돌아와 물과 구름의 한 켠에 누워 있노라.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