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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리영희 선생과 양재봉 회장을 보내며

by 호호^.^아줌마 2010. 12. 16.

 

리영희 선생과 양재봉 회장을 보내며


어찌하다 보니 나도 전형적인 486세대로 분류돼 그 세대의 한 모퉁이돌로 살아가고 있다. 1980년대를 지내오면서 내게 “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무와 의미를 던져 준 몇 사람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늦봄 문익환 목사와 또 얼마전 타계한 리영희 선생, 그리고 언론학도였던 나에게 참된 언론인의 오기와 기상을 보여주며 당시 언론노조를 이끌던 권영길 씨 등이다.

 

1987년도엔가, 광주에서 리영희 선생의 강연을 들었고, 그 이듬해 선생을 비롯한 해직언론인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낸 한겨레신문에 국민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의 타계소식에 가슴 치며 애통해 하는 천붕(天崩)의 심정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슴 한 켠의 보루가 무너지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 무너진 바람벽을 이제 누가 막아줄 것인가?

 

리영희 선생이 광주에 묻히고 싶다하여 국립5·18묘지에 모셔진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민주성지’, 바로 그 분을 위한 안식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잇달아 날아온 또 한 명의 부음, 대신증권 창업주인 양재봉 회장이 지난 9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실 나는 증권과 금융업 계통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에 그 분이 어떤 점에서 탁월한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를 나와 은행원으로 시작해 한국 금융계의 거목으로 성공하기까지 그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을지 막연히 동경해 왔을 따름이다.

 

하지만 분명한 몇 가지 기억은, 머리가 좋아 공부도 곧잘 하고 재능도 많았던 여고시절 한 친구가 가정형편으로 인해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꿈을 꺾으려 할 때 양재봉 회장이 설립한 대신송촌장학재단이 그 친구의 꿈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교회학교 제자였던 한 소녀가 부모 슬하도 아닌 아동복지시설에서 생활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며 끝내 서울 유수의 대학에 진학했을 때 그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준 인물이 바로 양재봉 회장 아닌가.

 

양 회장은 마지막 가는 날까지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7천만원이라는 사랑의 종잣돈을 남기고 떠났다.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따라 오겠지만 지금 우리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를 바라보며 나아갈 것인가. 서산대사가 지었다고도 하고 순조 때 활동한 시인 이양연이 지었다고도 하는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눈 덮인 들판을 갈 때에도/ 모름지기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나는 과연 두 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까. 다만, 존경하는 마음으로 길이 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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