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이야기

[스크랩] 권정생

by 호호^.^아줌마 2011. 5. 17.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이오덕 선생님께

제 동화가 어둡다고 말하는 분이 있지만, 저는 결코 제가 겪어보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는 쓸 수가 없습니다.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전 앞으로도 슬픈 동화만 쓰겠습니다.

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가치가 없습니다. 산다는 건 눈물 투성이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죄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만 있겠습니까...!

결국, 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울 수 없다면 죽어야죠."

 

 

몸과 마음과 영혼이 일치하는 삶을 사셨던 우리 마음의 작은 성자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전신 폐결핵이 걸려 동생 혼사에 걸림돌이 될까봐 집을 나와 떠돈지 칠십 평생,

5월17일 늘 그리워하신 어머님을 어매 어매 부르다 '어머니가 사시는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갖은 병마와 벗하며 찬밥 한덩이 함부로 버리지 않고 개똥도 귀하다 여기며 '몽실언니'와 '강아지똥', '한티재의 하늘'같은 글들을 쓰셨습니다.

적지 않은 인세 수입도 거의 모두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쓰고 남기신 것은 겨우 작은 오두막집 한채.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달라'는 말씀을 유서로 남기셨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거의 모든 인세 수입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오두막을 없애 자연 상태로 돌려놓고 자신을 기념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반평생 사셨던 안동 조탑리 오두막집 뒤 빌뱅이 언덕에 묻히셨습니다.

  

 

"외롭다고 째째하게 밖으로 푯대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혼자서 꾹꾹 숨겨 놓고 태연스레 살 뿐이다. 하느님이 계속 침묵하시듯 우리도 입다물고 견디는 것뿐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대학 입시에 수석합격했다고 감사하고, (...) 이런 감사는 모두가 이기적인 감사이다.

내가 금메달을 따면 못따는 사람이 있고, 내가 수석을 하면 꼴찌한 사람이 있고, 내가 당첨되면 떨어진 사람이 있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못되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감사를 하느님은 절대 기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신다.

왜 나만이 앞서야 되는지 좀 생각해보기 바란다."

 

 

"선생님, 나무 한그루도 돌멩이 하나도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고, 또 다르게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모든 것을 똑같이 보고 똑같이 느낀다면 목숨이란 것이 있을 이유가 없겠지요. 비슷하게 보고 느끼는 건 괜찮지만 획일화를 요구하는 건 차라리 죽으라는 말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경북 안동 산골마을의 작은 토담집.

해방뒤 객지를 떠돌다 19세때 걸린 폐결핵. 몰래 집을 나와 유랑걸식 하다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조탑리. 경북 안동에서 오십리길 산골마을. 사과나무밭 개울가에 붉은 슬레이트지붕을 얹고 선 조그마한 흙담집. 동화작가 권정생씨는 아무것도 없이 두마리의 강아지 「뺑덕이」「구대기」와 그곳에서 산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눔의 걸 참 많이도 썼군』

 

1937년 일본 도쿄 혼마치 뒷골목에서 태어난 가난한 노무자의 아들. 해방 이듬해 돌아와, 소작농인 아버지와 행상하는 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뒤 각처를 떠돌며,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재봉틀상회 점원노릇을 했다. 떠돌면서 문학에 눈을 뜬 그는 신문연재소설로부터 시장바닥에서 파는 삼류 대중잡지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나 오랜 객지생활은 19살 청년에게 몹쓸 병을 안겨주었다. 늑막염과 폐결핵은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번졌다. 아들 병구완을 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 시집갈 나이가 된 여동생과 늙은 아버지에게 부담이 될까봐 집을 나와 대구 상주 점촌 문경을 전전하며 유랑걸식을 했다.

꺼져가는 생명을 부여안고 도착한 곳이 안동 일직면 조탑리. 함석지붕의 조그만 시골예배당 문간방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그는 「종지기」의 삶을 시작한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뎅그렁뎅그렁」 종을 울렸다.

TV드라마로 방영된 몽실언니의 원작료 70만원으로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었다. 2평이 채 안되는 비좁은 단칸방. 수북이 쌓인 책. 밥상 위 사발시계, 문지방너머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도마와 양은그릇, 솥단지가 살림살이의 전부다.


『바람도 살고 햇빛도 투명하고 교회종소리도 들려오지.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야. 내가 두 그릇의 물을 차지하면 누군가 나 때문에 목이 말라 고통을 겪는다는 걸 깨달아야 해. 그래야 올바른 세상이 되지』

지난해 펴낸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끝으로 글쓰기를 중단한 권정생씨. 몸도 아프지만 단칸방 그의 작은 창을 통해 들려오는 세상소식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람다움의 근본은 머리쓰는 일보다 몸쓰는 일에 있거늘. 자연의 품에서 땀흘려 제 몫을 버는 농업을 사람 살아가는 목숨이라 부르지. 두다리로 걷고 두손으로 노동하며 흙에서 살아가는 길. 압제자를 향해 피흘리는 투쟁도 소중하지만 진정한 혁명은 자신의 삶이 바로 서는 일이야』

『장가도 못가고, 왜 사는지도 모르게 밥먹고 똥누고 해해해해 웃으며, 가을들판 바람부는 대로 춤추는 허수아비처럼 못나게 살아왔어』


4년전 아동문학상을 주려는 문단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안동까지 직접 상패를 들고 내려온 문단 원로들에게 그는 항의하듯 말했다.

『우리 아동문학이 과연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런 상을 주고받습니까. 아동문학만이라도 상을 없애야 합니다』어색한 분위기속에 떠밀리듯 받아놓은 상패. 닷새뒤 상패와 상금을 우편으로 되돌려보냈다.
 

 

아주 밝은 기운으로 요즘 아이들을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나친 경쟁교육으로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챙기는 세태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어떤 공격이든지 잘 막아내며, 또 때에 따라서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남을 공격하기도 한다. 

문제는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누구를 공격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약하다는 걸 잘 알기에 남의 공격에 대해서 무서워하기 일쑤이다.  이 아이들에게 세상의 이런저런 공격은 무지막지 하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딱 두가지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하나는 흉기를 들고 자기를 방어하려는 폭력적인 아이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아이들을 흉폭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인 아이들의 뒷모습에는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절박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폭력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제 방에 숨어 나오지 않는 모습이다.  친구조차도 언제 자기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 아이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제방에 갇혀 게임만 한다.  이렇게 경쟁이라는 공격만 일삼는 세상에서 연약한 아이들이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이 두 가지 뿐이다..."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69)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 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 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이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명과 함께였다.

» ‘교회 종지기’의 나무아래 예배 - 권 선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모자를 눌러쓴 채 얘기를 했다. 그와 수십 년 지기인 이 목사도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이렇게 말씀을 오랫동안 하는 것도 처음 본다”고 했다. 권 선생이 생전 처음 베푼 말잔치는 소리 소문 없이 온 산하를 물들여버리는 가을 기운 같은 축복이었다.

 

 

작가 권정생이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뜻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기도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여덟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인간이 저지르고 하느님 뜻이라니… 천당가는 것보다 따뜻한 삶이 중요

“할머니가 네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 한 권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마을 뒤편 작은 개울가에 있는 권 선생의 오두막은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게 할 만큼 쓸쓸했다. 이끼로 덮인 바위를 지나 들어선 앞마당 잡풀 사이에 권 선생이 불을 때 밥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솥이 걸려 있었다. 오두막은 5평 남짓.(사진) 그러나 그도 평생 읽어온 책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사용하는 공간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는 0.3평이나 될까.

 

 

장애와 천대를 안은 채 살아온 가련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몽실 언니〉의 삶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서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밖에 안 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마당가 바위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풀이 무릎 높이까지 자란 마당엔 선생님이 불을 때 밥을 했을 솥단지가 걸려 있었습니다.
문 앞엔 책과 신문 같은 것들이 지붕 높이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방문 위엔 그가 써 붙여 놓은 듯 ‘권정생’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댓돌 위엔 권 선생님이 마르고 닳도록 오르고 내렸을 빨래판 같은 게 놓여 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문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전신 결핵을 앓아온 선생님은 몸 상태가 아주 좋을 때가 ‘쌀 두가마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아프기에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도 문을 열어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방은 약 2평 남짓한 방 두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부엌방이기도 한 문간방엔 문 밖과 마찬가지로 온갖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만 나있었습니다. 그 안쪽이 권 선생님 거처였는데, 사방에 누렇게 채색된 책들이 쌓여 있었고, 겨우 몸을 웅크려서나 누울 수 있을 법한 공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수십 년은 됐을 법한 조그만 텔레비전 위엔 선생님이 드시는 듯한 약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독신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이 전율로 다가와 저는 마당에서 한 시간 동안 멍청하게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책 <몽실언니>와 <강아지똥> 들은 수백만명이 읽은 베스트셀러들이기에 최고로 호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교회 종지기의 삶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번 선정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수십만부, 많게는 백만부가 팔린다는 MBC의 느낌표 선정조차 단박에 거절한 선생님입니다.  외적인 조건에 상관 없이, 천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절음발이 몽실언니와 외로운 강아지똥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권선생님이었습니다. 

 

 

   

권정생과 ‘영혼’을 나눈 지인
이오덕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권정생)
 

“부디 건강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충분히 약을 복용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도 선생님을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이오덕)

“그저께는 쑥을 뜯어와 손수 밀가루를 반죽해서 쑥나물 부침개를 구워 먹었습니다. 앞으로는 산나물도 뜯어와야겠습니다. 찬거리가 없기도 하지만, 깨끗한 산나물을 먹으면 한결 봄기분이 납니다.”(권정생)

“손수 나물을 뜯으시고 반찬을 장만하시는 선생님의 생활이 눈물겹기도 하고, 성스럽게도 여겨집니다.”(이오덕)

아동문학가 권정생과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였던 이오덕(1925~2003) 선생이 주고 받은 편지다. 1970년대 초반, 당시 벽지 초등학교 교사이던 이오덕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12세 연하였던 권정생의 아픔을 달래며 살림을 보살피고, 병고와 가난, 외로움에 시달리던 권정생은 그 아픔과 외로움을 이겨내며 아름다운 작품을 써서 그 사랑에 보답했다.

전우익

편지글에 담긴 실로 슬프고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 19세 때 전신 결핵에 걸린 뒤 전국의 여기저기를 떠돌다 30세 때부터 경북 안동시 조탑동의 교회 종지기로, 또는 빌뱅이 언덕 오두막에 외롭게 살았던 권정생이 영혼을 주고 받은 인간 관계는 이오덕 외에도 몇몇 더 꼽힌다.

 

가톨릭 농민회를 이끌다 물러나 경북 봉화 청량산 인근 비나리마을에서 손수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정호경 신부, 평생 농사를 짓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을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란 제목의 책으로 낸 고 전우익(1925~2004) 선생, 목사이자 시인, 동화작가, 번역 문학가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을 쓰며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함께 ‘노자 이야기’를 펴내기도 한 이현주 목사 등이다.

이현주 목사


권정생은 특히 가톨릭 신부로 농민들과 고락을 함께하다 끝내는 신부에서 물러나 농사를 짓고 사는 정 신부를 존경하며, 그를 소재로 ‘비나리 달이네 집’이란 동화를 쓰기도 했다. 이 목사는 1970년대 이오덕으로부터 권정생의 소문을 듣고 찾아간 뒤, 30여년 그와 ‘형님·아우’로 교유해온 지기였다. 이 목사는 그의 부음을 들은 뒤, “한달 전 병원에서 형님을 뵈었을 땐 병이 많이 낫고 있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편 아동문학가로 권정생을 자주 찾으며 모셔온 주중식(56) 샛별초등학교 교장은 “선생님을 뵐 때마다 ‘언젠가 우리 자동차 몰고 자유롭게 금강산 구경 가자’고 말씀드리곤 했는데, 때마침 남북한의 기찻길이 뚫리는 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며 “더할 수 없이 슬프고 안타깝지만, 선생님답게 죽음을 잘 준비하고 계시다 마지막까지 좋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1970년대 초반, 마흔일곱살의 경상북도 산골 학교 교사인 이오덕(사진 왼쪽)씨가 안동에서 혼자 사는 서른다섯살 무명의 아동문학가 권정생(오른쪽)씨를 찾아갔다. 중견 아동문학가였던 이씨는 권씨의 동화  〈강아지똥〉을 읽은 뒤 해맑은 작품세계에 반해 일면식도 없었지만 먼저 권씨의 집을 방문했다.

열두살 차이, 띠동갑인 두 아동문학가는 금세 마음이 통했다. 두 사람은 이후 수백통의 편지를 수십년 동안 주고받으며 평생지기로 우정을 쌓았다.

 “저의 자취 경력은 이래저래 아마 이십 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저녁밥을 해 먹고 누우면 글에 대한 생각, 문우들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권 선생님의 작품집이 출판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 하고 며칠 밤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이오덕, 1973년 4월30일)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권정생, 1973년 2월8일)

 

이씨는 세상의 번잡함을 거부하고 안동땅에 틀어박혀 홀로 어린이 문학에만 몰두하는 권씨의 작품을 알려 빛을 보도록 했다. 권씨 역시 문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이씨와 함께 나눴고,

창작을 마치면 가장 먼저 이씨에게 글을 보내 평을 들었다.

“요즘 저는 아동문학에서 아주 철저하고 과감한 태도로 평을 쓰고 논리를 세워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안일무사주의와 문단출세주의로 흐리멍텅하게 되어 있는 우리 아동문학을 일깨워

전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이오덕, 1974년 11월23일)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건넛집 살구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며칠 전 창동이네 할머니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걸 보니 할미꽃을 따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으셨더군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권정생, 1985년 4월11일)

 

이씨는 권씨와 주고받은 편지 하나하나에 직접 제목을 달아 보관해 왔다.

 

“선생님 가신 곳은 어떤 곳인지, …〈일하는 아이들〉에 나오는 그런 개구쟁이들과 함께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 밑 시골집 마당에 둘러앉아 옥수수 까먹으며 얘기 나누시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이 담에 우리도 때가 되면 차례 차례 선생님이 걸어가신 그 산길 모퉁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이씨는 임종 전에 일절 조문객을 받지 말고 부고도 장례 이후에나 알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묻힐 곳 근처에 세울 시비를 지정해 남겼다. 시비 하나에는 권정생씨의 〈밭 한 뙈기〉를 넣고,  다른 하나에 자신의 시 〈새와 산〉을 넣도록 했다.

충주에 있는 이씨의 무덤가에는 지금 고인의 바람대로 두 시비가 마주보고 서 있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출처] 권정생|작성자 안심입명

 

 

출처 : 전남들꽃연구회
글쓴이 : 김진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