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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이야기

이명행 '푸른 여로'

by 호호^.^아줌마 2011. 12. 2.

 

 

 푸른 여로

                                                                                                                          이명행

 

1.

 

  녁 공기는 제법 시원했다. 하긴 거의 숲 속에 들어앉은 것이나 진배없는 아파트였다. 잘 골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을 지났다. 공중전화박스 곁에 긴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중전화박스 뒤편에 경차인 연두색 모닝이 서 있었다. 그곳은 외진 곳이었다. 정원등의 불빛이 가 닿지 않은 곳은 어둠이 짙었다. 주차장이 아직은 넉넉한데 왜 이 외진 곳에 차를 세웠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처음 본 차가 아니었다. 몇 차례 그곳에 연두색 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었다. 차 색깔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라니까, 푸른여로가 맞아요. …… 그래요, 파란여로도 있고요. 노란여로도 있는걸요? …… 그래요, 내일 보면 알 수 있어요. 확인해 보자고요. 후훗.”

  공중전화박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비어 있었다. 건너편 벤치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해요? …… 그래요? 아이 좋아라. 글쎄 그럴 줄 알았다니까. 조금 있다가 올라갈게요. 아직은…… 그래요. 경비실에 김 씨 아저씨가 있어요. 다시 확인해 볼게요. 알았어요.”

  거기서 여자가 일어섰다. 나는 여자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고, 그녀는 숲을 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여자가 뒤돌아서 나오면서 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는 시늉을 했다. 괜스레 미안해졌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셈이었다. 남의 얘기를 엿들었다는 자책감이 들었으나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내 병적인 호기심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순식간에 나는, 여자의 전화 상대는 아픈 사람이다, 여자는 남자의 방으로 올라가는 문제를 두고 경비실 직원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접수하고 있었다. ‘남자’라고? 누구도 그런 정보를 주진 않았다. 하지만 남자인 것이 낫다. 여자가 정원등 불빛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재빠르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외모를 ‘스캔’했다. 인상적인 용모는 아니었다. 그녀의 푸른색 구두가 눈에 띄었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그렇게 하고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푸른 여로’였다. 푸른 여행길이겠지? 참 싱그러운 나그네 길이다. 아니라니까, 하고 그녀는 상대의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는 푸른여로가 맞아요, 했다. 그러고 난 후, 그래요, 하고 긍정한 뒤, 파란여로도 있고요, 라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푸른여로와 파란여로가 한 번씩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부분에서 어떤 울림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푸르다, 라는 말과 파랗다, 는 말은 실제로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어울리지 않은 그 두 색깔이 정원등이 밝힌 솔숲 오솔길로 퐁 퐁 퐁 튀며 사라져 갔다.  

 

2.

 

  방은 12층에 있다. 내 위로 5층이나 더 있는 17층 원룸 구조의 아파트다. 일주일에 나흘을 이곳에 칩거하며 일을 한다. 이곳에서 한 달 넘게 지냈지만, 이 건물에 방이 몇 개인지 알지 못한다. 중앙 로비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구부러진 기역자 모양의 거대한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세 대다. 이 세 대의 엘리베이터 사이에는 촘촘하게 방들이 늘어서 있다. 마음먹고 세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남쪽 끝에서 중앙로비까지, 다시 중앙로비에서 서쪽 끝까지를 오가며 방 문짝에 삿대질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사정은 없었다.

  내 관심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내 귀는 소나Sonar처럼 예민하다. 한 여자의 울음소리와 한 남자가 땅 꺼지게 토해 내는 한탄이었다. 그 두 소리가 같은 방에서 나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 두 소리가 가지고 있을 심사는 같은 종류여서 서로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버렸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오지랖이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울음소리 끝에 한숨소리가 들렸는지, 한숨소리가 나고 울음소리가 이어졌는지 따져 보지도 않았다. 이 두 소리에 관한 한 나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들었달 뿐이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그것이 가졌을 온갖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 소리를 언제부터 듣기 시작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날 밤 문득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는 편이 정확하다. 내 무의식 속에 그 소리들이 이미 있지 않고서 그것이 그토록 익숙할 수는 없다. 그 소리는 매우 익숙했다. 그때 내 반응은 이랬을 것이다. ‘오늘은 저 집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처음으로 의식한 것은 울음소리 쪽이었다. 고단한 일상을 잠자리 위에 내려놓는 순간 그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삶은 참 행복하다. 하지만 수면 유도제까지 챙겨먹고 이제는 자지 않을 수 없어 잠자리에 부리듯 몸을 내던지는 삶은 조금 안쓰럽다. 그날도 나는 멜라토닌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횡행하고 있었다. 분절된 이야기의 토막들이 벽을 기어오르고 입체파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천장 아래에 비행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흑’ 하는 소리가 터졌다. 약간의 공명을 꼬리처럼 달고 울린 ‘흑’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저 밑 어딘가에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다. 바로 아래층이거나 옆방은 아니었다. 벽 한두 개를 통과해서는 그런 공명이 따라붙을 리 없었다. 나는 그 울음소리에 ‘세련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주었다. 거듭되면서 군더더기 없이 간소해진 울음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위로가 되게 하기 위해 주술처럼 쓰이거나 넋두리처럼 쓰일 울음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이제 제 스스로에게 마저도 다짐받을 이유를 잃어버린 허허로운 울음소리였다. 통곡에서 시작했을 것인데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진화 과정이 거기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이 속 깊은 의미를 지녔을 울음소리를 듣고 앉아 있었던 시각은 새벽 두 시였다.  

 

3.

 

  작은 도시는 내 고향의 군청소재지다. 이곳에서 20km쯤 떨어져 있는 내 고향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검문소 비슷한 곳이기도 하다. 블랙홀처럼 인간들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저 수도 서울로부터 귀향하게 되면 열차를 타고 내 고향의 도청 소재지를 지나 이곳 군청 소재지에서 내려 버스를 이용하거나 택시를 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택시기사를 하거나 역전에서 이런저런 장사를 하는 고향 선후배나 친구들에게 검문 비슷한 것을 당하게 된다. 일은 잘 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가족들은 모두 무고한지. 고향집에 당도하기 전에 내가 왔다는 소문이 집에 먼저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전에서 누군가를 만나 차라도 한잔하면서 지체하게 되면 영락없이 그렇게 되었다.

  내 고향에 기차가 서는 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만 서울에서 오는 빠른 열차는 그곳에 서지 않는다. 우리가 떠날 때는 고향의 기차역에서 떠났었다. 밤새 서울을 향해 꽥꽥거리며 가는 완행열차였다. 지금은 서울 가는 완행열차가 없어졌다. 군청 소재지쯤 되어야 서는 특급열차만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고향의 국민학교는 초등학교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살아남아 있다. 그것이 그렇게 살아남아 있어 매우 기껍다. 초등학교라는 것이 살아남아 있기 쉽지 않은 곳이 ‘고향’이다. 사람들의 고향에서 초등학교가 사라지고 있다. 물론 대도시를 고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예외다. 아이 낳았다고 자축하는 플래카드를 내거는 실정을 이해하고 보면 고향에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가 살아남아 있는 사실에 기꺼워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겠다. 아이들이 지천이어서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던 시절이었다. 한 반에 예순다섯 명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었는데, 그러고도 공부 끝나고 집에 가는 하굣길에 그제야 등교하는 2부 아이들을 만나던 때였다. 면민이 모두 2만 명이었던 우리의 고향 국민학교 학생은 모두 2천 명이었다. 지금은 2백 명쯤이라고 들었다. 나머지 천 8백 명은 태어날 수 없었던 셋째였거나 우리의 아이들처럼 수도 서울 아류의 대도시로 쓸려가 태어났을 것이다. 그곳이 아름답고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여간 간교한 힘의 작용이 아니다.

 

  리들은 민들레 씨앗 같은 존재들이었다. 봄날 꽃이었다가 씨앗이 되면 한 움큼 바람에도 몸이 가벼워져 흩날리듯 난 자리에는 흔적도 없었다. 성질 급한 씨앗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날아가 버리기도 했고, 늦어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떠나야 했고, 어느 도시 공장이나 가게의 도제가 되었어도 떠나야 했다. 씨앗이 날아간 방향은 철로의 방향이었다. 그 선이 가지런했다. 가장 멀리 날아간 것이 수도 서울이고, 그 다음이 도청 소재지였고, 가장 가까이는 군청 소재지인 이곳 P시였다. 물론 바람의 방향을 잘못 타 엉뚱한 곳에 떨어진 씨앗도 있을 것이었다. 가장 먼 서울에 가장 많이 날아갔다. 그 다음 많은 수가 도청 소재지인 J시이고, P시에는 아주 조금만 날아와 살고 있다. 어쨌든 고향에 남아 있는 씨앗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몇몇뿐이었다.

 

  근에 나는 고향의 군청 소재지인 P시에 머물며 일할 곳을 마련했다. 일주일을 절반으로 나누어 서울과 P시를 오간다. 가족과 떨어져 호젓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한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숨어 산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야 알려져서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고향에서 너무 멀리, 그리고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다. 그 때문에 고향의 모든 것들과 서먹해져 있었다. 그것들과 다시 관계를 맺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그저 서먹한 채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숨어살기에 적당한 곳이 바로 이 방 한 칸 구조의 아파트였다. 안으로 들어오면 별 느낌 없이 흔한 원룸이겠지만, 건물 전체를 두고 보면 좀 색다른 면이 있었다. 첫 머리에서도 말했지만, 어지간한 아파트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방의 숫자가 그렇다. 아파트 부지로만 본다면 작지 않은 주차장을 가지고 있지만, 늦은 시간에는 차가 넘쳐 도로에까지 밀려나와 있었다. 지상에만도 어지간한 아파트만큼 주차장을 갖췄고, 지하에도 그만 한 주차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저녁이면 차들이 도로에까지 길게 줄을 서는 것이다. 각 방에 한 명씩이 기본이겠고, 많다 해도 신접살림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로도 차는 넘쳤다. 이렇게 밀도가 높으니 시선이 분산되어 내 거처가 보다 은밀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고향을 코앞에 두고 도둑고양이처럼 서식하고 있다. 이 익명성을 방패로 은근히 훔쳐보기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아파트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여기에 이런 아파트가 왜 필요했을까? 근처에 새로 생긴 대학이 있었다. 신생 대학들이 대개 그렇듯 이 학교도 학생모집이 어려워 날로 쇠락해 가는 느낌이었다. 이 아파트도 대학과 사정이 비슷했다. 처음에는 비싼 월세에도 학생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의 학생 숫자가 줄면서 세입자도 줄었다. 덕분에 월세가 가벼워졌다. 서울의 같은 규모 원룸에 비하면 다섯 배쯤 차이가 났다. 월세가 가벼워지면서 시내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지금은 그들이 학생 수보다 많다. 가끔은 노인들도 보였지만 대부분 시내로 출근하는 젊은 사람들이다. 아침이면 썰물처럼 나가고 저녁이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 썰물과 밀물은 때가 일정해서 그때만 피한다면 아주 호젓했다. 복도로 통하는 철문 하나를 닫으면 세상은 오직 방 한 칸이었다. 단절감이 구중궁궐 못지않아서 그 점에서는 서울에서도 누리지 못할 호사라고 여겼다. 적어도 ‘흑’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4.

 

  울에서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내려왔다. 가벼운 산보도 좋았지만, 이미 자전거에 익숙해진 몸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를 나선다. 경비실 문 앞에 앉아 졸던 경비원이 벌떡 일어선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씩 웃고는 그만이다. 그가 씩 웃었던 것은 내게 보내는 호의가 아니다. 그냥 우습다는 거였다. 반바지에 타이즈를 신고 울긋불긋한 헬멧을 쓴 내 모습이 그리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거의 일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가끔은 관리실 문 앞에 앉아 졸거나 중앙 현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늘 일을 하고 있었다. 앞뜰의 풀을 베거나 복도와 계단 청소를 하거나 엘리베이터 앞에 쏟아 놓은 오물을 치우거나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우선 방학이어서 한적해진 학교를 둘러보고 싶었다. 종합대학이었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문학이나 사회학 쪽은 학생모집을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그나마 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나란히 붙어 있는 의과대학과 보건대학 덕분이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내려왔다. 모두 여학생들인 것으로 보아 간호학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켜 가는 그들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운동장이 보였다. 온통 푸른 잔디밭이었다. 웅웅웅, 기계음이 들렸다. 다섯 명의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예초기로 잔디를 깎는 중이었다. 건너편에서는 한 무리의 아낙들이 역시 일렬횡대로 앉아 잔디 사이에서 자란 잡초를 뽑고 있었다. 보건대학 건물을 돌아서니 체육관이 나타났다. 체육관을 옆구리에 끼고 돌았다. 문득 정면으로 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에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문 바로 앞까지 갔다가 핸들을 돌려 다시 문에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문을 바라보았다. 보건대학 건물과 체육관이 막아선 때문인가? 그 왕성하던 예초기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작아져 있었다. 그 모기 소리만 한 예초기 기계음을 빼놓고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라고? 그것은 그저 작은 문이었다.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나무들 위로 내려앉는 햇살의 고고한 느낌이 아니었다면, 그 숲에서 흘러나와 아스팔트를 적신 물, 그 수면 위의 무수한 반짝임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했을 작은 문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문 앞에서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 문을 함부로 나가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함부로 나가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저 문이 문제인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내가 문제인가?

  문 바깥쪽에 알 수 없는 어떤 세상이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나가는 ‘구멍’이 바로 저곳일까? 그때 한 남자가 내 뒤쪽에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나를 비켜 지나 그 문을 향했다. ‘여보시오!’ 하마터면 그렇게 부를 뻔했다. 내가 목울대에 걸려 있는 그 말을 되삼키는 순간 사내는 문을 나섰다. 사내가 문을 나서는 순간 그 위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그를 하얗게 만들었고, 다음 순간 다시 그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사라졌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전거를 바로 세우고 페달을 밟았다. 문설주 양쪽으로 햇살이 커튼처럼 걸려 있었다. 햇살의 커튼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놀랍게도 오래된 숲길이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가로수로 여겨지는 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길은 ‘도로’였다. 이를테면 버려진 신작로였다. 어쩌면 한때는 많은 자동차들이 이 길을 질주해 갔을 것이다. 버려져 있는 동안 도로 양쪽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길 위를 터널처럼 뒤덮고 있었다. 길은 시작부터 야트막한 오르막이었다. 오호라, 제법 운동을 하게 생겼군. 페달에 실리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울창한 숲이 아주 천천히 내 곁을 지났다. 숲의 정령이 바로 내 곁에서 꿈을 짓는 느낌이었다. 내 곁을 지나쳐 먼저 간 사내가 길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자 그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수줍음이 많은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자전거를 멈췄을 것이다. 길은 계속해서 구불구불 오르막이었다. 길이 구부러진 간격이 고만고만했다. 좌로 구부러지거나 우로 구부러지거나 간에 비슷한 거리였다. 길은 구부러지면서 그 다음 구부러진 길을 감추고 있었다. 구부러진 지점에 닿으면 새로 나타날 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기대는 언제나 충만하게 채워졌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드러나는 푸른 여백이 싱그러웠다. 모퉁이를 돌면서 눈을 감았다. 피부에서 공기가 일렁이며 바람이 되는 순간을 느꼈다. 순간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온통 진분홍이었다. 때는 8월이었고, 자미화가 제철이었다. 군데군데 무더기로 꽃을 피워낸 오래된 나무들이었다. 누군가가 이 길을 꾸미기 위해 오래 전 심었을 것이었다. 이미 고목이 된 배롱나무에서 피어난 진분홍 꽃에 취해 서 있는데, 마주 오던 승용차가 옆에 와 섰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근처에 대학교가 있지 않나요?”

  “있지요.”

  “어떻게 가지요?”

  “그냥 이 길로 쭉 가시면 됩니다.”

  내가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싱거운 질문에 싱거운 대답이었다.

  “아, 그렇군요. 이쪽으로 가면 학교로 들어가는 길과 만나는 교차로가 나옵니까?”

  나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교차로는 없습니다만, 학교로 들어가는 문이 나옵니다.”

  “교차로가 없다고요? 길을 건너야…….” 하면서 그의 표정이 답답해졌다. 결국 자동차 문이 열렸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손을 내저었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차에서 내렸다.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 큰길에서 좌회전을 해 도로 반대편에 있는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었는데, 얘길 하다가 그만 놓쳤어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 샛길로 우회전해서 들어왔습니다. 이 길로 가다 보면 그 큰길과 만날 수 있는 교차로가 나오겠지 하고요. 방향은 어쨌든 학교 방향이니까요.”

  그가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저 긴장할 뿐 다른 도리는 없었다. 나는 조금 전 그 학교의 작은 문에서 나왔고, 그 문을 통해 그가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 길이 맞습니다. 제대로 오셨어요. 이 길로 가시면 바로 학교가 나옵니다. 길을 건너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교차로 따위는 없고요. 이 길 어딘가에 바로 학교로 들어가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오른쪽을 잘 살피고 가시면서 그 구멍을 찾으세요.”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고 중얼거렸던 것 같았다. 별로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자동차 문이 닫히고 엔진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한적해지면서 자미화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왜 ‘구멍’이라고 했을까? 어쩌면 그것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것을 문이라고 하지 않고 구멍이라고 했지? 그곳을 ‘빠져나왔다’라고 했던 것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빠져나왔다면 그것은 문보다 구멍이어야 제격일 테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 정도에서 털어버렸다.

  자동차가 서는 소리에 뒤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아까 모기만 한 소리로 내게 ‘안녕하세요?’ 했던 창백한 사내가 있었다. 내게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사내에게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모기만 한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오르막을 올랐다. 핸들에 달린 계기를 보니 4km쯤 오르막을 올라왔다. 그 고갯마루 아래에 작은 광장이 나타났고, 그곳에 휴게소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중국집이었다. 점심 한 번 저녁 한 번을 해결한 적이 있는 식당이었다. 이 집 의자에 걸터앉은 것이 이로써 세 번째다. 지난주에도 왔었다. 그때 ‘휴가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이 집에 와서 얻어먹을 궁리를 하고 물을 가져오지 않았었다. 갈증이 난 나는 옆집 주막을 기웃거렸다. 오래 전 이 길로 서울을 오르내릴 적 이곳 뒷밤재에는 중국집이 없었다. 재를 넘는 나그네의 허기를 달래 준 것은 오직 이 주막이었다. 난 이 주막만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만 하고 있는 집이 아니었다. 이 집은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동기생의 집이기도 했다. 그와 친했다면 더 많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별로 가까이 지낸 친구는 아니었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할 때 저만치 손을 흔들어 안부를 전하는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가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영민했던 그가 말단 지방공무원에서 시작해 중앙부처 사무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주막을 지키고 있던 노인이 물 사발을 내밀었다.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물 사발을 받아든 나는 묻지 않았다. 그 친구의 소식을 물으면 내 신원을 밝혀야 하는데, 그것이 마뜩치가 않았다. 뱃속까지 서늘하게 했던 냉수였다. 그날 주막 앞에 연두색 모닝이 서 있었다.

 

  “그 집 며느리 차예요. 색깔이 요상하지요?”

  며느리라면 그 친구 안사람이겠다. 내가 보기엔 중국집 아낙의 미소가 더 요상했다.

  “병든 시어머니 보살피겠다고 짐 싸가지고 들어왔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읍내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읍내에? 혼자 살다니?”

  “죽었지요, 남편이. 남편 죽고 고향으로 내려왔지요.”

  “죽다니, 왜?”

  놀랐다. 뜻밖의 부음이었다.

  “부지런한 사람이라 무리했던가 봐요. 과로사였대요. 몇 년 됐어요.”

  “며느리 고향도 이곳인가요?”

  “그렇지요. 지금은 없어진 동강 술도가 딸인데, 근데 차 색깔 한번 요상하지요?”

  그녀의 후렴 또한 이상했다. 어라, 동강 술도가 딸이라고?

  “그럼 이름이 영흰데.”

  불쑥 그녀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아무리 가까이 지낸 사이가 아니라 해도 그렇지, 왜 그것을 그의 옛집 앞에서, 그것도 이 생경한 중국집 아낙에게 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처가 동강 술도가 딸이라는 대목에서 더 크게 가슴이 철렁했다. 이유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니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술도가 고명딸을 잘 알고 있었다. 내 곁에는 그녀를 매우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몇 년 전 동창회에서 사라져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또 다른 친구였다. 그 친구는 그녀와 맺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두 오빠의 반대 때문이었다. 반대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듣지는 못했다. 그 친구는 술도가 앞에 앉아 ‘꽃부리 영’ 자 ‘기쁠 희’ 자를 외치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나도 그가 그 일인 시위에서 철수하기로 한 마지막 날, 위로차 술도가 앞에 갔었다. 고통스러운 실연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난 뒤여서 그는 핼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뒤 그의 행동은 두고두고 화제였다. 그런데 이 친구에 관한 마지막 소식은 동창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동창회에서 사라졌다고. 일 년에 한 번쯤 동창회에서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이제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가족은 알고 있나 해서 수소문을 해보니 그의 가족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그가 운영했던 회사가 부도난 뒤 잠적했다는 말을 들었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었다.

  그동안 모두들 바빴는가. 단지혈맹의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백 년이 지나도 우리의 우정만은 변치 말자는 다짐들이 있었지 않은가. 그때는 한없이 절실했을 그 동맹의 진정성이 이리도 허망하게 퇴색되었더란 말인가. 위에서 말한 죄책감이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우정에게만이 아니라, 고향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었다.

 

  가지 새로운 소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중국집 아낙이 내온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교차로’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내 머리를 헝클어트린 주막집 아들과 술도가의 딸도 이 ‘교차로’와 전혀 무관하달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었다. 어떤 이유로 이 문제가 그 문제와 관련되었다고 여겼는지 설명할 길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의 핵심에 교차로가 있다는 믿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해지고 있었다. 자동차를 끌고 이 길로 들어온 그에게는 교차로가 있어야 했고, 학교에서 막 나온 내게는 교차로가 없었던 것이다. 길은 교차로를 지나지 않고도 이미 만나 있었다. ‘이미’에서 내 팔에 소름이 끼쳤다. 그것이 살아 있어서 일을 꾸몄거나 만약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이 단순한 법칙에서마저도 소외된 자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앞의 ‘그것’은 자미화가 화려하게 장식한 길이다. ‘버려진’이라는 말 또한 앞에 덧붙이는 것이 좋겠다. 이 신작로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J시로 통하는 국도였는데, 4차선으로 시원하게 큰길을 만들고 난 뒤 버린 길이었다. 이 길도 철로와 마찬가지로 결국 수도 서울에 닿게 되어 있었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버려지기 전에는 이 길에서 자미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 길에 자미화가 피기 시작한 것은 버려진 후일 것이다. 누가 나무들을 가져다 그리 꾸몄을까, 궁금했다. 역시 쓸모없는 궁금증이었다.

  

5.

 

  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그 길을 거슬러 와 고향의 문턱 근처에 머물고 있다. 정확히 30년 전에 떠난 고향이었다. 주로 승용차로 오가기 때문에 열차 역이나 버스 터미널에서 고향 사람들 눈에 띌 가능성은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때는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는 위에서 이미 했다. 그건 진심이다. 나는 지금 고향을 숨어서 보고 듣는다.

  다시 울음 얘기를 해보자. 나는 아파트 방바닥에서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가 수반하는 것들에 관해 관심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울음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억울해서 우는 울음, 슬퍼서 우는 울음, 누군가가 짠해서 우는 울음, 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그런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흑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일반적인 울음을 말하라면 나는 이 여인의 울음을 꼽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울음들을 끌어 모아 그것들이 가지고 있을 개성적인 것들, 울음이 수반한 것들을 모두 다 제하고 나면 바로 그 여인네의 울음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기호화된 울음이었다.

  그렇다면 한숨소리는? 한숨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하지 않았다. ‘이걸 어쩌면 좋나!’ 하지 않았다. ‘하 참, 이거 큰일이구먼!’ 하지 않았다. 그저 ‘하!’ 했을 뿐이다. 도무지 그 한탄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이 세상의 모든 한숨소리를 모아 그것들이 가지고 있을 차이들을 다 없애고 나면 바로 그 남자의 한탄이 될 것이다. 그저 나오는 한탄이었다. 그의 삶이 곧 한탄이고, 그의 몸뚱이가 곧 한탄이고, 그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 또한 뭉뚱그려져 터진 한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그랬다는 것일 뿐, 한탄과 울음의 이유에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그것은 내 느낌일 뿐이다. 어쩌면 나는 그 두 사람의 한탄과 울음소리에서 내 한탄과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6.

 

  “았다. 여기 있네. 당신이 말했던 근처인 것 같은데? 맞아, 꽃이 푸르네. 근데 파란여로는 뭐지? …… 아, 그렇구나. 맞아, 자색 원형 무늬는 없어. 그럼 이건 푸른여로네.”

  참 염치없는 일이었으나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난 그 남자가 구부러진 그 길 저쪽에 앉아 있는 것을 몰랐다. 자미화 아래 앉아 중국집 아낙에게 얻어온 물을 마시기 위해 마개를 막 열었던 참이었다.

  “응, 괜찮아. 조금 쉬고 있는 중이야. 오늘은 좀 많이 걸었어. …… 시내 나갔었구나. 그럼 돌아오는 길에 만날 수도 있고. …… 저녁에는 올 거 없어. 낮에 남은 밥도 있고.”

  물 마시는 소리마저도 죽여야 했다.

  “조금 있다가 들어갈 거야. 그 사이에 오면…… 알았어.”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자전거를 끌고 중국집 방향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삼백 미터쯤 올라왔을까, 그곳에도 한 무더기의 자미화가 피어 있었다. 자미화는 배롱나무의 꽃이다. 자색이 아닌데 왜 자미화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궁금했었다.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수피樹皮가 홍자색을 띠고 있어서 자미紫薇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어느 여인의 피부처럼 매끄러운 홍자색 표면의 감촉은 내 손에 익숙하다. 간질이면 홍자색의 몸이 반응을 한다. 간지럼나무라고도 불렀다. 며칠 전 아파트 정원에서도 이 나무를 보았었다. 부지런한 경비원이 그 아래의 풀을 뽑고 있었다.

  “배롱나무는 햇볕을 좋아해서 양지에 심어야 하는데, 여긴 해가 잘 안 들어요. 그래서 나무가 시원치가 않아요.”

  “그래도 꽃빛깔은 제대로 났네요.”

  “옛날에 한 청년과 처녀가 사랑을 했어요. 청년의 직업이 상인이어서 멀리 물건 팔러 떠나며 돌아오면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해요. 하지만 풍랑이 심해 살아오기 힘든 곳이었는지, 돌아오는 배에 흰 깃발이 걸리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고, 죽었다면 붉은 깃발이 걸릴 것이라는 희한한 예언을 남겨요. 도대체 이 무슨 수작인지, 쯧쯧. 하루가 십 년 같았을 처자가 언덕 위에서 기다리지요. 저 멀리 배가 돌아옵니다. 그런데 붉은 깃발이 걸렸어요, 이런! 그걸 본 처자가 절망해 언덕 아래로 몸을 던져요. 사실은 돌아오는 길에 해룡과 싸우다가 해룡의 목을 베었는데, 그 피가 깃발을 적신 거지요. 청년은 살아 있었답니다. 돌아온 청년은 슬피 울며 처자의 장례를 치렀는데, 후에 묘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자랐어요. 많이 듣던 얘기지요? 어쨌든 그 나무의 꽃이 바로 이 자미화랍니다. 이 꽃은 가을이 되기까지 세 번을 피고 진대요. 한 맺힌 울음이지요. 한이 맺혔으니 꽃 색깔이 한결같이 이렇지요.”

  그러니까 지금 두 번쯤 피었을 시기였다. 30분쯤 지났을까. 아래쪽 길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 웃음소리였다.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각이었다. 저녁 일거리를 준비해야 했다. 저녁 먹기 전에 그날 밤에 일할 목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아래 학교로부터 뒷밤재 주막까지 야트막한 산 하나를 올라온 셈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계속해서 내리막이다. 얼굴을 향해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나는 그 느낌을 즐긴다. 아까 내가 조용히 자리를 떴던 그곳에 연두색 차가 서 있었다. 차를 보는 순간 괜히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이 자미화 그늘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애써 그들을 외면했다.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내가 지나는 동안 그들도 말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말을 멈추었고, 나는 그들을 외면한 채 그곳을 지나쳤다. 그들의 모습을 주변시(周邊視)로 확인할 수 있었다. 외면했지만 내 온 신경은 그쪽을 향해 열렸다.

  나는 그를 보지 않았지만, 본 것 같았다. 얼굴색이 창백했던, 수줍음이 많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내게 옆모습을 보이며 구멍을 빠져나갔던 그 사내였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쩌자고 내 상상력은 이리도 질긴 것일까. 나는 끝내 묻고 말았다. 네가 바로 그냐? 나는 허공 속 사내에게 물었다. 네가 바로 술도가 앞에 진을 치고 몇 날 며칠을 울었던 바로 그냐?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십 리 길을 어찌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경비원이 관리실 계단에 앉아 있었다. 며칠 전에도 그 연두색 차가 공중전화박스 뒤편에 서 있는 것을 보았었다. 그가 그 차를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경비원에게 물었다.

  “저기 아저씨, 혹시 공중전화박스 뒤편에 가끔 서 있는 연두색 모닝 말이죠.”

  경비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친 김에 나는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연두색 차?”

  “예, 혹시 그 차를 아세요?”

  “왜? 그 차에 볼일 있소?”

  안다는 뜻이다. 속에서 쾌재가 일었다. 슬그머니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자 경비원의 표정이 망연해졌다. “그 차가 몇 호에 온 차인지 궁금해서…….”

  경비원이 되물었다.

  “궁금하다니?”

  “글세, 그냥.”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저 위 ‘연두색 모닝’에서 달라진 그의 표정을 읽었어야 했다.

  “신경 끄세요.”

  그는 내 호기심에 아주 대못을 박았다. “세상에 궁금한 걸 못 참는 것만큼 천박한 게 없답디다. 당신 일 아니면 쫑終! 아시었소?”

  하지만 내 궁금증은 천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다시 질문을 디밀었다.

  “그 사람 많이 아픕니까?”

  그러자 경비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나를 곧 집어삼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픈 걸 알면 그걸로 쫑!”

  몸이 아프다고? “그러면 서울에서는 언제 내려왔는지……?”

  “서울? 아니, 이 사람이 알면서 탐문하는 거야, 뭐야? 당신 도대체 누구야?”

  누구냐고? 그가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 부분에서 화들짝 놀랐다.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로비로 들어섰다. 그리고 막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머릿속 가득 방금 내가 저지른 일들이 헝클어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경비원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도대체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실수는 일방적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내려왔고, 몸이 아프다는 사실은 모두 내 입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혹시 그의 이름이 김 아무개 아닙니까, 하지 않았던 것만 위로 삼아야 할 지경이었다.

 

7.

 

  는 이 날 밤 자동차를 몰아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누구에게라기보다 내 스스로에게 들킨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덜렁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와 버린 것도 대책이 없는 처신이었다. 고향 문턱에 숨어 들어가 마음 편하게 지낼 계획이 다소 어긋나 버리긴 했지만, 그만한 일로 도망까지 친 것은 분명 과민한 반응이었다.

  서울에서 며칠을 보낸 뒤 나는 다시 한밤중에 자동차를 몰고 있었다. 아내는 한밤중에 일어나 문득 P시에 가겠다고 나서는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내에게는 ‘문득’이었겠지만, 나로서는 그 시각이 사람들 눈을 피할 가장 좋은, 이를테면 계산된 시각이었다. 새벽녘 도착할 생각으로 두 시쯤 집을 나섰다. 텅 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그 옛날 술도가 앞에서 ‘꽃부리 영’ 자 ‘기쁠 희’ 자를 외치던 친구를 떠올렸다. 그가 주막집 며느리와 만나고 있는 그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가 몇 년 전 문득 내게 전화를 했었다. 다짜고짜 몇 편의 시를 썼는데 읽어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가 시를 썼던 것이 떠올랐었다. 그 시절 그는 시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인이 되지 않았다. 내게 전화를 건 그 시점도 그를 만난 지 아주 오래된 때였다. 그가 시를 썼다는 사실보다도 그가 어찌 살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었다. 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내게 실제로 시를 보냈는지 마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의 사업체가 어려워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문에 건강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가 나보다 먼저 이곳에 숨어들어 고치를 짓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회귀성 어종의 본능 같은 것인가? 하지만 이것도 한숨소리와 울음소리를 묶어냈던 오지랖 넓은 내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다. 주막집 아들과 동강 술도가의 딸, 술도가 문 앞에 울려 퍼지던 “‘꽃부리 영’ 자 ‘기쁠 희’ 자”, 뒷밤재 주막집으로부터 학교에 이르는 길에 흐드러진 자미화, 그 으슥한 길에서 들었던 ‘푸른여로’,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 옆에 서 있던, 자미화 꽃길에도 서 있던, 뒷밤재 그 주막 앞에도 서 있던 연두색 모닝이 내 상상력의 소품이었다. 나는 아직 그가 그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라!

  생각에 쫓겨 길을 놓쳤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J시로 가는 4차선 국도에서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맞다. 푸른 여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길을 놓쳤으니, 길을 찾아야 했다. 터널을 지나 가장 가까운 샛길로 우회전했다. 샛길 들머리에서 낯선 휴게소와 여관을 보았다. 하지만 샛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눈에 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어, 이게 어디야! 하는 동안 내 차는 이미 뒷밤재 주막 앞에 이르러 있었다. 얼마 전 내게 학교로 가는 길을 물었던 운전자가 떠올랐다. 그처럼 나 역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교차로가 없다면 길은 만날 수 없다. 그제야 나는 그가 왜 자신의 상황을 그토록 과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이란 없다. 그의 말이 장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곧 되새긴 그의 말에서 단서를 찾았다. 그는 큰길에서 좌회전을 해 도로 반대편의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려 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사람과 얘기를 하느라 그곳을 놓쳤다. 길을 놓쳤음을 바로 깨닫고 첫 번째 만난 샛길로 우회전해서 들어왔다고 했다. 그 길에서 나를 만난 것이다. 거기까지 되새긴 나는 갑자기 팔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그 길은 바로 조금 전 내가 길을 놓쳤던, J시를 향해 뚫린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였다. 그 도로 J시 방향 왼쪽에 대학교 정문이 있다. 그 도로에서는 좌회전을 해야 학교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지점을 놓치고 첫 번째 샛길로 우회전을 했다면 그는 여전히 큰길을 사이에 두고 학교와, 그러니까 나와는 반대편 쪽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쪽에 있었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그랬다. 도대체 이 길들은 어떻게 만난 것이지? 나는 길 저쪽이 푸르게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파르스름했던가?

 

  끝에 자미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무 아래로는 융단처럼 진홍색 낙화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진홍색마저 푸르렀다. 머리에 들어와 박혀 요지부동인 푸른 여로를 다시 되뇌고 있었다. 고향에 와서도 여전히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 도무지 이 길부터가 익숙하지가 않으니. 도로가 새로 나고 옛길이 숲 속에 버려지면서 나 역시 이곳에서 버려진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으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주막집 아들과 그 친구 사이 어디쯤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무렵 문득 내가 그나마 주막집 아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친구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막집 아들과 그 친구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자와 결혼했지?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도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다. 비로소 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고향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것들을 지우고 없어진 것들을 제자리에 놓는 과정은 지난한 전투였다. 쉽지 않았다. 거창하게 들어선 대학교를 없애고 J시를 향해 새로 뚫린 4차선 도로를 지우면서 나는 비로소 혼란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제야 내가 서 있는 길이 호젓해졌다. 결국 영희를 사랑했던 그 친구 집이 산에서 구불구불 내려온 이 길의 끝에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대학교와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압도한 나머지 그곳에 본래 있었던 것들이 지워졌거나 초라하게 존재감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느새 차를 몰아 아파트 근처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곳에 차를 세운 뒤 나는 대학교가 생기면서 한꺼번에 들어섰을 원룸촌을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을을 그려 넣으니 비로소 그 친구 아버지가 하시던 과수원이 떠올랐다. 그 친구의 집은 과수원 서쪽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과수원 서쪽, 그쪽을 바라보니 아파트가 거대하게 솟아 있었다. 내가 지난 한 달 반 동안 숨어 지냈던, 밤새 귀를 기울여 사내의 한숨소리와 여자의 울음소리를 듣던 바로 그 아파트였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토록 감쪽같을 수가 있을까. 그 느낌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이 낯설었다. 거대한 음모 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떠난다고 떠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헐레벌떡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짐을 싸는 대신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는 다시 뒷밤재 주막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자전거를 세웠다. 내려다보이는 길이 푸르렀다. 우리가 떠났던 길이었다.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는 셈이었다. 우리는 이런 길을 얼마나 더 가야 할까. 사위가 고즈넉했다. 비로소 산 아래로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J시로 향하는 4차선 도로 위의 자동차들이 산 속으로 질주해 들어오는 소리였다. 자동차들은 무서운 속도로 쳐들어왔다. 교차로가 없다면 길은 만날 길이 없다. 터널, 교차로는 땅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뫼비우스 띠 위에 서 있었다. 길은 여전히 푸르렀다. 나의 푸른 여로였다.

《문장웹진 12월호》  

 

* 작가의 덧말 : 여로는 멜란티움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여름에 자색 꽃이 피는데, 꽃 색깔에 따라 푸른여로 파란여로 노란여로 등으로 불리는 것도 있다.

 

소설가 이명행 씨가 7년 만에 소설을 발표했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되었던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 이후 처음.


지난 2년 동안 7편의 단편소설을 썼고, 1편의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라 한다.

쓰기만 하고, 발표는 미뤘는데, 이번에 그 첫 번째 소설을 종이책이 아닌 웹진에 내놓았다.

<문장웹진> http://webzine.munjang.or.kr/ [소설을 펼치는 시간]이라는 항목에 있다.


나주 다시면이 고향인 이명행 작가를 1983년엔가,

기자 초년시절 ‘황색새의 발톱’를 통해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