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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비판과 포용의 사이

by 호호^.^아줌마 2011. 1. 21.

 

비판과 포용의 사이


금장태(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조선시대 도학(주자학)의 두 축을 이루는 거장을 퇴계와 율곡으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퇴계는 천성이 봄바람처럼 온화한 분이라 누구를 엄격하게 꾸짖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해 율곡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에서, “그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논변한 것을 보면 번번이 앞 시대 유학자의 학설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먼저 그 옳지 않은 곳을 찾아내어 배척하기에 힘써서, 그가 다시는 입도 뻥끗 할 수 없게 한 다음에야 그친다”<『答李叔獻』>는 말로 율곡을 엄중하게 질책하였던 일이 있다. 율곡이 이런 꾸중을 듣고 나서 과연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지적을 들으면 누구나 얼굴이 붉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율곡의 비판적 자세에 대해 퇴계는 포용을 강조


학문하는 자세에도 기질적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옛 유학자의 글을 대할 때에, 퇴계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읽고 자신의 인격을 닦아가는 데 길잡이로 활용하는 경건한 수도자형 인물이라면, 율곡은 이론적으로 치밀하게 분석하여 논리에 어긋나는 점을 남김없이 예리하게 지적해내는 합리적 분석가형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퇴계의 수도자적 자세에서 보면, 율곡이 옛 유학자의 이론적 결점을 샅샅이 찾아내어 비판하는데 몰두하는 태도는 누구를 본받아 배우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의 글을 읽거나 남의 말을 들을 때에, 누가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비판을 해주면, 눈이 환하게 열리고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의식이 지닌 지성이 소중하지만 포용과 이해의 자세를 지닌 덕성이 결핍되면 각박해지는 병통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퇴계의 편지에서 이 대목을 읽고 나서, 우선 퇴계가 율곡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견제하였던 사실을 주목하면서, “처음 배우는 자가 경전을 가지고 선생이나 어른과 왕복하며 토론하려면 반드시 그 학설에서 착오가 있는 곳을 집어낸 뒤에야 비로소 의문을 제기하여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율곡이 당시에 선생(퇴계)에게 왕복 편지로 토론하고자 하였으니, 그 질문한 바가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릇 남의 흠을 꼬치꼬치 찾아내고 새로운 의견 내기를 힘쓰는 것은 진실로 큰 병통이 되지만, 지혜를 버리고 생각을 끊어서 전적으로 옛 경전을 답습하는 것도 또한 실지로 얻음이 없다”<『陶山私淑錄』>라 하여, 율곡의 비판의식이 배우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일이라 적극 변호하였다. 그 다음에 다산은 율곡의 독자적 비판태도와 퇴계의 수용적 포용태도에 각각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양자의 입장을 종합하고자 시도하였다.


다산은 옛 사람의 글을 읽을 때에는 의심스러운 곳을 만나면 비판하거나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내세우려 들지 말고, 또한 옛 사람의 말이라 아무 생각 않고 무조건 따르겠다는 태도를 보여서도 안된다고 본다. 여기서 그는 먼저 이해의 폭을 넓혀 말한 사람의 본래 취지를 다각도로 반복하여 깊이 생각해보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해가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으로 단순하게 갈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 가운데도 옳지 않은 것이 드러나고, 옳지 않은 것 가운데도 옳은 것이 드러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비판의식의 가을 서릿발처럼 시원함을 넘어서 포용적 이해의 봄바람처럼 따뜻함을 누릴 수 있게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비판은 맹목과 독선을, 포용은 야합을 경계해야


비판은 하나의 관점에 서 있어야 명확하고 일관하게 제시될 것이요, 포용은 여러 관점을 두루 고려해야 조화롭고 원만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판을 하는 태도에서는 자신이 서 있는 입장의 위치나 범위가 한정된 것임을 인정해야 다른 입장에 대해 맹목적이고 독선적 비판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고, 포용하는 태도에서는 자신의 입장이 명확하게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 상태임을 인정하여 여러 입장을 통합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기준을 찾아야 적당주의나 이해득실에 따른 야합의 타협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다산은 건강한 비판과 포용의 태도로서, “남의 잘못된 곳을 발견하였더라도 공평한 마음으로 미루어 이해하고 순리로 해석하여, ‘아무개는 그렇게 보았으므로 그렇게 말하였던 것이요, 지금 이렇게 보면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陶山私淑錄』> 한다. 비판의식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제시해주고, 창의적 사고를 배양해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처럼 서로 대립하여 끊임없이 의견의 충돌이 일어나고 비판의식만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있는 현실에서는 퇴계의 수도자적 자세를 다시 음미하는 다산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