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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이야기

김진초 단편소설...이과두주

by 호호^.^아줌마 2011. 1. 28.

오늘 아는 분의 페이스북에서 이과두주라는 말을 보고,

아, 이 말이 지금까지 내가 모르던 뭔 사자성어인갑다...

하고 찾던 중에 발견한 내용입니다.

짧으면서도 깔끔한 글맛이 그만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김진초 단편소설] 
                    

이과두주
                                                                  
친구들 몇이 광후의 49재를 지내기 위해 떠났을 시각, 나는 한 주먹 광후가 들어 있는 바지를 꿰입고 공원을 올랐다. 광후가 내게 선물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선물인 이과두주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가 안 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친구들의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나만의 이별식을 택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자 손바닥이 꺼끌꺼끌하니 광후 부스러기가 묻어 나온다. 그렇지. 우리가 언제 매끄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우린 원래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광후는 화장하던 날부터 쭉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광후와 한 반이 되던 중학교 2학년부터 나이 오십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 나와 붙어 있었던 적은 없지 싶다. 지난 49일 동안 광후는 지은 대로 펼쳐질 앞날이 두려웠을까 몰라도 나와 함께 했으니 조금은 덜 외로웠으리라.

느닷없이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고 나타난 광후가 밴댕이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다 불쑥 말했었다.
“내일 49재가 있어 오늘 중으로 가야 해.”
“49재라니?”
혹시……. 나는 얼마 전 죽은 광후의 아들을 떠올렸다. 반들반들한 눈빛이 빠르게 잘 돌아가던 밉상의 아이였다. 하지만 그 또한 아이 탓이 아니니 나무랄 일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나는 그 아이만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 어림잡아 그 아이 49재가 될 법도 한 시기지 싶었다. 그러나 어차피 내가 참석할 바도 아니고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광후의 심사만 건드릴까봐 입을 다물었다.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어. 내가 거기 주지야.”
역시 녀석은 녀석답게 나의 허를 찔렀다. 한 반 년 안 보이더니 제법 큰 사기꾼이 된 모양이었다.  
“너 같은 시로도 땡중이야 가나마나 아니냐?”
불쑥 스님 복장을 하고 나타나도 나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워낙 엉뚱한 녀석이라 그 또한 별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
“허, 내참. 불목하니도 과분할 네가 주지라…… 또 웬 눈먼 과부 하나 후렸냐?”
광후가 클클대며 웃었다.
“시작은 그랬는데 아무튼 좋다. 고요한 게 좋아. 가끔 공부하는 맛도 괜찮고.”
“짜아식 일났네. 철들자 망령이라는 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으나 미워할 수도 없는 녀석이었다.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건 녀석에게 친구가 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기에 녀석이 날 필요로 할 때마다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알기 싫어도 녀석의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하여튼 중놀이 좀 해야겠어.”
녀석은 중노릇에 제법 흥미를 느끼는가 보았다. 당장 내일 있다는 49재에 대해서도 꽤나 그럴 듯하게 설을 풀었다.  
일단 숨이 끊어지고 나서 49일 동안 영가는 죽은 것도 아니요 산 것도 아닌 채로 49일 동안 중음신이 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일단 육신에서 빠져나온 중음신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지은 업대로 가게 된다. 망자는 일주일 간격으로 일곱 번에 걸쳐 49일 안에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이때 도력 있는 스님이나 법사님을 통해 악도에 가지 않고 좀 더 나은 세계에 가도록 일주일마다 한 번씩 일곱 차례 재를 지내는 것을 시다림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종자가 되어 끝없는 세월, 4생 6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불교의 궁극은 그 윤회를 끊으려면 사람 몸을 받았을 때 깨달아야 한다는 거야.”
“야, 그런 공부하면서 뭐 느끼는 거 없데? 지은 죄가 무섭지도 않느냐구.”
“느끼지. 이제부터야말로 몸 사리지 말고 좀 더 많은 여자들을 즐겁게 해주어야겠다고. 그게 바로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지고 온 사명이야.”
“얼씨구!”
“두고 보라니까. 내 죽으면 세 트럭은 좋이 되는 여자들이 내가 진짜니 내가 먼저니 자리다툼해서 아마 너를 눈꼴깨나 시게 할 걸.”  
“점점. 야 그나저나 너 같은 날탱이가 49재씩이나 주재한다니 정말 걱정이다.”
녀석이 입가의 막걸리를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꼭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이야. 그리고 눈물겹게 고맙네만 걱정 마시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 다른 사찰에서 스님 둘이 원정오기로 했어.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 별 거 없어. 돈이면 다 해결 돼.”
“진짜 재미있냐?”
나는 무엇보다도 중노릇이 재미있다는 녀석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니까.”
“설마 보살들 건드리는 재미는 아니겠지?”
“말하면 잔소리지.”
화장실에 다녀오던 광후가 막걸리를 더 시켰는지 주모 분순 씨가 주전자를 내왔다.
“하여튼 이 양반 손버릇은 옷을 갈아입어도 여전하네.”
녀석이 화장실 다녀오면서 주모 엉덩이를 더듬은 모양이었다.
“내가 사준 빤스 입었나 궁금해서 그랬지.”
작년 발렌타인데이였던가? 우리 분순 씨 선물이야. 녀석의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선물이라니요? 오늘이 쪼꼬렛트 주는 날이잖아. 이 오라버니가 그거보다는 실속 있는 것으로 준비했지. 요일빤스로 일곱 개 들었으니까 매일 내 생각하면서 갈아입으라구. 어머어머 세상에. 나 남자한테 팬티 선물 받는 거 처음이에요. 아무튼 고마워요. 주모가 얼굴이 빨개져서 호들갑을 떨었다.
녀석은 보통 짠돌이가 아니었다. 물론 내가 녀석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녀석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대접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어쨌거나 술값이고 밥값이고 당연하다는 듯 내게만 미루는 게 때로는 밉살스럽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녀석은 길가에서 하나에 천 원짜리 싸구려 팬티를 색깔 별로 골라 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모는 감동한 눈치였다. 확실히 녀석은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광후의 짓궂은 장난에도 불구하고 주모는 그를 싫어하기는커녕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하긴 그만하면 번듯한 인물에 후리후리한 키에 명색이 화가라는 동년배 남자가 치근대는 게 싫지만은 않을 터였다. 주모는 땅딸막한 키에 얼굴은 희멀건 보름달 같고 엉덩이가 조선 반 만해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유형이었다. 게다가 나이가 오십 줄이니 물이 가도 한참 간 여자 아닌가.
“이건 서비스예요.”
예상대로 주모의 선심이 준치회 한 접시로 올라왔다.
“이게 끝이면 고올란한데.”
광후의 손이 습관처럼 주모의 엉덩이로 가자 주모가 소녀처럼 눈을 흘겼다.
“하여튼 대낮부터 놀고들 있네. 됐어요 분순 씨.”
일단 주모를 물린 다음 녀석을 향했다.
“그게 언젯적 빤슨데 아직도 울궈먹고 있냐? 너도 염치 좀 있어 봐라.”
“재미있잖아.”
녀석이 클클대며 웃었다. 우리는 인근 차이나타운에서 저녁을 때우고 자유공원을 걸어서 넘어왔다. 그러면서 몇 군데 술집을 또 거쳤다. 중앙동쯤에선가? 녀석이 불쑥 福자를 거꾸로 써 놓은 불그죽죽한 중국상점에 들어가더니 65도짜리 이과두주 두 병을 들고 와 내게 한 병을 건넸다.
“잠 안 올 때 한 잔씩 마셔.”
“잠이 왜 안 오냐? 너처럼 죄 많은 중생이나 잠결에 혹시 저승사자에게 끌려갈까 봐 잠을 못 자지.”  
“하여튼 기념이야.”
“뜬금없이 기념은 무슨?”
광후가 쑥스러운지 민머리 뒷덜미와 턱을 번갈아가며 긁적거렸다.
“뭘 사서 너와 나눠가진 기억이 없어서……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오늘을 기념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야.”
“짜아식 싱겁긴. 독주 먹고 너처럼 독해지라고?”
“……?”
장난기 많은 망나니라면 모를까 사실 녀석은 독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돈 안 쓰는 데는 누구보다 독했다. 하긴 쓸 돈이 없기도 했다. 말이 화가입네지 녀석은 개인전 한 번 열지 못한 처지였다. 그러니 돈도 안 되는 그림보다는 여자 꽁무니 따라다니는 게 한결 실속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녀석은 제비는 아니었다. 여자들이 쥐어주는 용돈은 굳이 사양 않으나 뽑아내 쓰지는 않는 듯했다.  
어쨌든 나는 오랜만에 만난 녀석이, 아들 잃은 지 얼마나 됐다고 기름기 질질 흐르게 살이 붙은 모습으로 나타나 당황스럽고 징그러웠다. 머리를 민 거야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차피 녀석은 벌써부터 정수리가 벗겨져 모자를 쓰고 다니는 신세였으니 차라리 시원하게 밀어버리는 것도 괜찮을 법했다. 문제는 녀석의 기름기였다. 나는 녀석을 받자하면서도 계속 역겨움을 느꼈다. 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녀석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피둥피둥 살찐 거 보니 너 요새 팔자 늘어졌나 보구나.”
“그래 새끼야. 왜 샘 나냐? 내일 49재만 잘 치루면 완전 팔자 핀다.”
“순 도둑놈! 그렇게 큰일 앞둔 놈이 늦도록 술만 퍼마시냐? 그만 가라. 부처님 진노하실라.”    
하여튼 그게 녀석과의 마지막이었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광후를 지니고 다녔다. 이 바지는 도대체 왜 세탁을 못하게 하는 거예요? 마누라가 퉁퉁거려도 나 몰라라 말했다. 하여튼 건드리지 말고 내가 내놓을 때까지는 가만 놔둬. 모르긴 해도 나도 모르는 새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 광후를 먹기도 꽤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일 년에 몇 번 술잔을 앞에 놓고 되지도 않는 입씨름만 하다가 때로는 녀석이 혹은 내가 삐쳐서 파장이 나곤 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가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긴 우리 마누라조차도 내가 광후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했다. 그 사람, 광후 씨 말이에요. 화단에서 평이 안 좋아요. 무슨 평이 안 좋아? 활발하게 활동은 않지만 우리 마누라도 그림쟁이였다. 잘 알면서 시치미는. 그 왜 있잖아요, 문란한 거시기. 그런 사람이랑 어울리면 당신도 똑같은 사람 된다구요.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녀석과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대화가 삐딱선을 타고 말이 거칠어지곤 했다. 녀석과 나는 둘이 만나기만 하면 나이를 잊고 언어도 행동도 철부지가 되었다. 아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녀석은 내게 나는 녀석에게 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은 광후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 안다. 그러면서도 닮은 부분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걸 신기해했다. 천하의 바람둥이, 대책 없이 되는 대로 사는 방랑자, 광후는 길지 않은 인생을 그렇게 살다 갔다. 고아로, 술집 마담인 이모에게 얹혀 자란 광후, 패싸움이나 여자 문제로 사고뭉치인 그였지만 이모는 나름대로 거두었다. 이모가 남자를 불러들인 날 광후는 우리 집에 와서 자고 함께 등교했다. 미처 몸을 빼지 못한 날은 다락에 기어들어 신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썅년이 말야…….”
광호는 이모를 그렇게 지칭했다.
“배은망덕한 놈.”
내가 주먹으로 쥐어박으면 광후는 관두자 관 둬,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광후가 비뚤어지는 게 싫었다. 내가 광후 곁을 맴돈 건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제 이모에게 쌍욕을 하면서도 그는 어려서부터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인중 주변이 거뭇거뭇해지는 사춘기부터 광후는 치마만 보면 이성을 잃었다.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다.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섬으로 피서를 가면 나는 날이 샐 때까지 눈을 붙일 수 없었다. 함께 간 여자아이들 텐트 속으로 광후가 기어들까 노심초사 보초를 섰던 것이다. 그래도 어느 틈엔지 광후는 사고를 치곤 했다.
친구 누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고1 때였던가? 부모님이 집을 비운 친구네로 몰려가 술 마시고 기타 치며 새벽까지 놀다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었다. 친구 누나도 함께였다. 누나 옆에 누운 나는 잠결에 배 위로 지나가는 체온을 느꼈다. 광후의 손이었다. 광후는 내 배를 건너 누나의 젖무덤을 주무르고 있었다. 가슴이 퉁탕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몇 번 광후의 손을 제자리에 끌어다 놓았다. 그러자 광후가 내 손을 가만히 쥐더니 누나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빵빵한 풍선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진땀이 확 솟았다. 광후는 내가 공범이라도 된 양 마음 놓고 누나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광후에게서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광후보다 누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릴 질렀다.
“누나 뭐 해! 얼른 일어나서 건넌방으로 가지 않고!”
취한 누나가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너 같은 애송이가 뭘 알겠냐? 만져도 가만히 있는 건 허락한다는 뜻이야 임마. 네가 무슨 세상 여자 다 지켜주는 흑기사라도 되겠다는 거야? 꿈 깨 임마. 자꾸 훼방 놓으면 다음부턴 너 열외시킨다.”
광후가 툴툴거렸다. 날이 밝았을 때 어이없게도 녀석이 건넌방에서 V자를 그리며 나왔다.

평생 제대로 된 직장 한 번 가져본 적 없는 광후. 미술학원 원장과 결혼한 광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쫓겨났다. 바람기 탓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 피가 어디 가겠냐며 애비 닮아 평생 속 썩일 게 뻔한데 데려가라며 문을 닫아걸었다. 그 뒤 광후 부자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코흘리개 어린 것을 달고 대폿집에 오면 어린 것은 어른들이 시켜놓은 안주를 핼끔핼끔 눈치 보면서 주워 먹는 것으로 요기를 대신하다 고개를 뒤로 꺾고 졸았다. 둘이 있을 땐 얼마나 아이를 보듬는지 몰라도 광후는 툭하면 아이 귀퉁배기를 쥐어박고 예사로 윽박질렀다. 아이도 만만치 않아 아비가 그러거나 말거나 노여움도 안 타고 천연덕스러웠다. 눈치꾸러기 천덕꾸러기였지만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하여튼 광후는 여자 꼬시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그야말로 선데이서울에 날 만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처녀를 꼬드겨 동해안으로 떠났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들통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둘이 합의 하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숫처녀가 잘 열리지 않았고 광후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회음부가 찢어지는 사고가 난 것이다.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피는 끝내 멈추지 않아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고, 처녀의 오빠들이 찾아와 광후를 린치하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광후의 아내는 더 이상은 창피해서 못 살겠다며 이혼장을 내밀었다.
하여 광후의 아들은 광후만도 못한 환경에서 자라야 했다. 게다가 광후에겐 아들 보살피는 일보다 여자 만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모가 거둔 광후는 삼류대학이라도 졸업했는데 그 아들은 고등학교도 못 마치고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광후에게도 그 아들에게도 엄마는 없었다.
“죄 받어 임마. 거두지 못할 거면 뭐 하러 낳았냐?”
광후는 툭하면 경찰서에 불려 다녔다. 그럴 때마다 나를 대동하는 걸 잊지 않았다. 창피하게 뭐 하러 오셨어요?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광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말처럼 공허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덩달아 따라나선 나는 나보다 한 뼘은 큰 그 아들에게 용돈을 찔러주면서 말없이 어깨만 두드렸다. 저 아이는 나중에 뭐가 될까? 문득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는 늘 짐작의 허를 찌르는 법. 가방 끈이 짧고 망나니였더라도 엉뚱하게 성공하는 케이스가 있지 않던가. 나는 아이를 보며 부디 엉뚱한 미래가 펼쳐지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하냥 방황하던 아이가 마음을 잡았는지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 피자집 배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광후가 싱글벙글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마음잡고 오래지 않아 오토바이 폭주족이었던 광후의 아들은 오토바이와 함께 공중제비를 했다. 그리하여 아이의 엉뚱한 미래 또한 뭉텅 잘려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보다 더 재수 없는 놈이었어.”
화장장에서 광후는 꺽꺽 울었다. 그런 광후를 보며 나는 문득 아이엄마에게 생각이 미쳤다. 오래 전에 인연을 끊었더라도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찢어질까.
“광후야. 그래도 어쨌거나 자식이 죽었는데 애 엄마한테 알려 주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 썅년한텐 뭐 하러 연락 하냐? 사정 뻔히 알면서도 단 한번 들여다보지 않던 지독한 년인데.”
“야, 그건 네가…….”
“아, 글쎄 내 얘기가 아니라니깐. 나하고야 인연 끊을 수 있어. 그런데 새끼는 다르지 않냐? 어디 가서 잘 처먹고 희희낙락 살겠지 뭐. 야, 재수 없다 관두자.”
연락처는 모르지만 알아내고자 하면 가능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녀석은 끝내 아이엄마에게 아들의 사고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새끼. 잘 죽었지 뭐. 이제 홀가분해서 좋다.”
광호가 눈물 칠갑을 한 채 웃었다.
아들이 죽은 후, 한동안 침울하던 광후가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지방으로 때로는 해외로 돈도 못 버는 놈이 하여튼 재주는 좋았다.        
“야, 부안 그년은 밤새 거시기를 붙들고 자는 괴물이고, 설렁탕집 할마시는 결혼 안 하면 줄 수 없다고 튕기면서 오랄만 고집하고, 외국인 회사 부장으로 잘나가는 노처녀는 꼭 외국에 나가야만 그게 된단다. 하여튼 여자들이란 종자는 아무리 겪어봐도 오리무중이야.”    
“하여튼 너처럼 걸림 없이 사는 괴물 처음 봤다.”
녀석을 보면 복이 지지리도 없다 싶다가도 그처럼 자유분방하게 살기도 쉽지 않을 터라 일견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만큼 놀아났으면 이제 정착할 때도 되지 않았냐? 그 중에는 조건 좋고 몸 맞는 여자도 있을 거고. 정신 사납고 고단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제 나이도 있는데 물리기도 했겠구만…….”
“글쎄다. 나 좋다는 여자들이 널려 있는 한 그건 어렵지 않겠어? 왜? 내가 부럽냐?”
녀석이 음충맞게 웃었다.
“너 죄 받을까 봐 걱정돼서 그런다 임마.”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죄 없이 깨끗하고?”
“…….”
우리는 가끔 자유공원에 올랐다. 옛날 제물포구락부 뒤쪽 숲은 호젓해서 좋았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소주를 홀짝거렸다. 광후는 나만 만나면 대숲 만난 여편네처럼 이바구를 해댔다. 가끔 솔바람소리가 파도처럼 지나갔다. 입만 열면 나오는 그의 여성편력은 절반 이상 접고 들어도 상식을 초월했다. 관계한 여자가 백 명 가깝다는데 내 생각엔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성싶었다. 녀석은 왜 그렇게 많은 여자를 전전했을까? 세상에서 가장 힘에 세고 위대하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녀석. 그의 여성편력이 혹 어머니의 사랑을 찾아 헤맨 여정은 아니었는지…….
세 트럭 운운하던 광후의 흰소리와 달리 장례식엔 단 한 명의 여자도 오지 않았다. 나는 광후의 수첩을 들여다보며 자주 입에 오르내렸던 혹은 내가 만나보았던 비중 있는 이름을 몇 찾아냈다. 광후의 친구라고 밝힐 때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하이톤의 꾸민 목소리를 내며 상냥했다. 그러나 그가 어젯밤 계단에서 넘어져 뇌진탕으로 갔다는 소리를 하자 여자들은 하나같이 본래의 제 목소리로 돌아가 시큰둥하게 안됐군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영안실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다. 처음 전화를 할 땐 수많은 여자들이 떼로 몰려와 서로 상처받을까 봐 내심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돌변한 여자들을 확인하면서 나는 오기로 친절하게 장례식장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절친한 사람도 갑자기 시들한 사이가 되는. 당황스러운 여자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배신감이 들었다.
광후를 작별하는 이는 몇몇 동창들뿐이었다. 그의 전처는 연락처조차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죽은 것도 뒤따라 전남편이 간 것도 모른 채 살아 갈 것이다. 헤어진 뒤 피차 돌아볼 것도 없이 깔끔한 끝. 걸림 없는 사랑만 한 광후가 어쩌면 잘산 건지도 모르겠다.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사이만 살다 간 광후…….      
“잘 들어라. 중요한 건 바로 사이에 있어. 타켙만 공략하면 왕초보고, 교과서대로 멀리서 천천히 좁혀 오면 샌님이야. 프로는 지나치게 뜸 들이지도 단도직입적으로 문을 두드리지도 않지. 몇 군데 사이를 정성스럽게 건드릴 뿐.”
광후가 말한 사이는 눈과 눈썹 사이, 목과 어깨 사이, 다섯 개의 발가락 사이, 조개와 국화꽃 사이 따위였다. 그렇게 공략하면 열에 아홉은 꼴딱 넘어간다면서.
녀석은 어려서부터 성적인 학습에 열을 올렸다. 그의 가방 속엔 킨제이보고서나 플레이보이지 따위가 늘 들어 있었다. 나는 소지품을 검사할 때마다 녀석의 가방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야야 새가슴. 신경 꺼. 걸려 봤자야. 그 새끼들이 가져다 킥킥대며 볼 텐데 뭘. 저번에는 화학 가르치는 턱주가리 있잖아. 그 새끼가 소매를 끌더니 슬쩍 묻더라. 새로 나온 거 없느냐고. 솔직히 교과서만 공부냐? 이게 다 인생 공부지. 남자는 여자를 학습해야 성공하는 거야 임마. 여자를 행복하게 하는데 제일 경제적인 방법, 그거 제대로 학습하지 않으면 영영 돈 처발라야 하는 거라구.
    
우리가 자주 머물렀던 공원 숲에 주머니 속의 광후를 조금 내려놓는다. 잘 가라 광후야. 그와 함께 걸었던 북성포구를 향해 가며 단골집 문가마다 주머니 속의 광후를 나누어 내려놓는다. 그러고 보니 광후는 술 마시는 것조차도 머물 줄 모르고 자리 옮기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5차가 예사였다. 나란히 앉아 왼쪽으로 갸웃이 트인 바다를 보며 담배 연기를 날렸던 포구에서 주머니를 뒤집어 탁탁 털어낸 광후를 바다에 띄운다. 가라. 걸림 없이 가라. 부모도 없고 자식도 앞세웠으니 뒤돌아 볼 게 뭐 있으랴. 솔직히 너처럼 홀가분하게 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 너답게 잘 뒈졌다 새끼야. 네 입으로 말했지? 네 아들 죽었을 때 이제 홀가분해서 좋다고. 그래 나도 이젠 홀가분하다.
포구를 걸어 나오는 길에 책받침처럼 납작해진 몇 개의 시체를 만났다. 쥐 한 마리, 비둘기 두어 마리. 아무도 거두지 않는 시신을 또 하나의 차가 밟고 지나간다. 밟히고 또 밟혀 얇은 포가 된 시신은 부패하지 않는다. 열린 공간에서 박재가 된다.
손님이 없는지 주모는 스포츠 신문을 활짝 펴 코앞에 대고 있다. 요일팬티의 주모다. 내가 들어서자 천장에서 외줄로 내려온 백열등이 일시에 흔들거린다. 초겨울인데도 아직 거두지 않은 파리끈끈이가 몇 개의 티를 묻히고 주방 도마 위 공중에 매달려 있다. 밴댕이 안주를 시키고 녀석이 사준 이과두주 병을 꺼낸다.
“분순 씨. 오늘 술은 이걸로 할게. 괜찮지?”
“늘 두 분이 함께 오시다가 혼자 오시니 보기가 좀 그러네요. 빵떡모자 아저씨 일은 정말 안됐어요.”
주모가 알은 체를 한다. 광후가 화장실 가면서 엉덩이를 쓰윽 훑고 지나가면 손을 털어내며 웃던 여자. 이 여자는 또 얼마나 허전할까. 한때 광후와의 사랑을 꿈꾸다가 용기가 없어 접은 듯한 이 여자. 앞으로는 이 집 출입도 삼가야겠다. 저 여자는 나를 볼 때마다 광후를 떠올릴 것이고 나 또한 이 집에 올 때마가 광후가 생각날 터이니.
이과두주 두 잔을 따른다. 잘 가라 광후야. 앞자리의 잔에 내 잔을 부딪친다. 별 거 없어 임마. 그냥 꼴리는 대로 살다가 갈 때 되면 가는 거야. 광후가 눈꼬리를 내리고 웃는다. 뜨겁고 쨍하게 목구멍을 훑어 내리는 65도 독주, 불을 마신다. 불처럼 바람 따라 몸을 피우던  바람둥이 광후, 그 친구를 데일 듯 마신다. 목줄기를 데이고 나자 시원하고 달큰한 배즙 향이 스치듯 가벼운 화상을 달래준다.
곡류를 발효시켜 두 번 증류한 술이라 이과두주라는데, 분명 과일은 안 들어갔다는데, 이과두주에서는 배맛이 났다. 발효 ․ 증류하는 과정에서 생긴 제3의 맛일까? 광후가 그랬었다. 나는 말야 불교의 사생, 다시 말해 태생, 난생, 습생, 화생 중에서 습생과 화생이 신비롭더라. 습한 곳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벌레나 곰팡이 그런 거 있잖아. 사람도 한 달만 씻지 않으면 몸에 뭐가 생기냐? 그리고 화생 역시 홀연히 생겨나는데 생물의 몸이나 그 조직의 일부가 형태와 기능에서 전혀 다르게 변하는 거야.  
그렇다면 이과두주에서 생겨난 배즙 향은 습생일까 화생일까. 그런 걸 가지고 네가 옳니 내가 옳니 입씨름할 광후가 이제는 없다. 데일 듯 뜨거운 이과두주만 광후를 대신해 내 앞에 있다. 아 그렇지. 광후가 좋아하는, 광후가 가장 실력을 발휘하는 사이. 이과두주에도 사이가 있다. 이과두주는 증류할 때, 맨 처음과 마지막으로 나오는 수증기를 제외하고 그 중간의 수증기를 받은 술이다. 처음과 마지막 사이의 술. 그렇다면 배즙 향은 사이의 향일수도 있지 않을까?
생과 사의 중간, 생과 사의 사이에 들어 있었던 지난 49일. 이제 오늘을 끝으로 광후는 사이에서 벗어난다. 그 벗어남을 축하하기 위해 습생인지 화생인지 모르지만 배즙 향을 간직한 처음과 마지막 사이의 술을 우리는 함께 마신다. 자신의 49재를 위해 광후가 준비한 이과두주를. 광후가 내게 던져준 화두 ‘사이’에 잠겨 있다가 문득 우리 사이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친구 사이? 자신 없다. 내가 광후에게 과연 진정한 친구였는지. 누군가 그랬다. 친구는 기분 좋게 이용하고 기분 좋게 이용당하는 관계라고. 우리가 과연 그랬을까? 아니 내가 과연 그랬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 여자가 소리 없이 내 앞에 앉는다. 세련된 차림의 멋쟁이다.
“이거 그 분 잔이지요?”
여자가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다. 아니, 이 여자가 그 외국인 회사 노처녀 부장이던가? 술자리에 함께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죄송해요. 그때는 당황스럽고 어찌 해야 할지 분간이 안 가더라구요.”
부고를 알리자 이 여자는 그랬다. 그렇군요.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바쁜 건 아니구요. 아니 바빠도 상관없는데요, 아무튼 지금은 갈피가 안 잡히네요. 다만 놀라울 뿐이에요.
여자가 눈물을 찍어낸다. 여자도 오늘이 49재인 줄 알고 광후를 보내러 왔나보다. 여자의 잔을 채워주곤 주머니를 뒤진다. 손톱 끝으로 주머니 솔기를 알뜰하게 긁어내 여자의 잔에 털어준다.
“마셔요. 독하게 광후를 마셔버리세요.”
여자가 그 작은 잔을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광후를 어루만진다.
“경위를 좀 들려주실 수 있나요?”
“알면 뭐하고 모르면 또 어떻습니까. 이미 간 사람인데.”
생각해 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고무친인 그의 사인을 꼬치꼬치 캘 사람도 없었다.
암자 앞 가파른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는 광후. 방에 들어간 그는 머리가 아파 119를 불렀다. 그러나 막상 구급차가 왔을 때는 두통이 그만해서 되돌려 보내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본래 건강한 사람의 뇌진탕은 잠깐 머리가 맑아지기도 한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난 그는 다시 통증이 오고 의식이 흐려졌다. 그 아침, 암자에 홀로 있는 그를 들여다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곁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는 죽음을 면했을지도 모르겠다. 간신히 전화번호를 눌러 도움을 청했지만 구급대가 병원으로 후송하는 도중 그는 목숨을 놓았다. 사인은 뇌진탕이었다.
혼자 사는 건 그래서 위험하다. 그러나 누구처럼 죽은 지 몇 개월 지나 발견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신병을 관리했으니 어찌 보면 녀석답게 마무리를 잘한 셈이다.
서서히 죽음을 느끼면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럽고 누추하게 살다 일찍 외롭게 간 아들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렜을까. 표현은 안 해도 그가 아들을 끔찍이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매일 죽음을 꿈꾸었을지도. 혹시……?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녀석이 그랬다. 내일 49재만 잘 치루면 완전히 팔자 핀다고.
“광후가 죽기 며칠 전 49재를 지낸다고 했는데 혹시 누구 49재였는지 아십니까?”
“모르셨군요. 앞서간 그 아드님……. 사실은 친구분도 오실 거라고 하더니 안 오셨더군요.”
그 얘기 하러 왔다가 차마 말도 못 꺼내고 엉뚱한 입씨름만 하다 간 녀석. 녀석이 죽었을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 주책없이 쏟아진다. 안경이 거추장스러워 아예 벗어버렸다. 여자는 물끄러미 탁자를 바라보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려진 술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문질러댄다. 어쩌면 여자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눈물을 문질러대는지도 모르겠다.
고교시절 녀석과 나는 도시락을 못 싸갔다. 게다가 우리는 수업료도 못내 교실 대신 도서관으로 등교해 자율학습을 하곤 했다. 녀석이 나보다 먼저 등교한 날은 아침 대신 이모한테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휭하니 뛰쳐나온 날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남루하고 부끄러운 사춘기를 보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 수업료를 못내 도서관에서 자율학습을 하며 읽은 책 덕분에 풍부한 입담과 여자들의 심리를 꿰뚫는 센스, 그가 작정하고 덤벼서 넘어가지 않은 여자는 거의 없었다. 호색한인 그는 여자를 가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다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쭉쭉빵빵, 짜리몽당, 뚱땡이, 못생긴 여자, 예쁜 여자, 무식한 여자, 유식한 여자, 처녀, 유부녀, 과부, 할머니……, 누구든 그의 상대가 되었다. 한 설렁탕집 할머니는 녀석의 짓거리를 짐짓 즐겨 직접 관계는 피하는 대신 오럴은 자발적으로 해주었다고 한다. 설렁탕집 주방에서도 하고, 한적한 공원에서도 해주었다. 공원에서 할 때는 자기는 주변을 볼 수 없으니 대신 망을 보라면서 기꺼이 서비스를 해주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뭐가 좋은데? 내가 묻자 녀석이 말했다. 끝나고 내가 팬티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으니까 그래도 흥분은 되는지 축축하더라. 바로 그 맛이겠지 뭐. 지난여름에 녀석은 여자 덕분에 천만 원이 호가하는 호주 뉴질랜드 여행을 다녀왔다며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마 그때 동행했던 여자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지 싶다.  
녀석은 죽기 보름 전 나를 찾아왔다. 밴댕이에 막걸리를 마시고 간단히 자장면으로 요기를 한 뒤 몇 군데 또 들러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늘 그렇듯 마지막은 싸움으로 끝났다. 무엇 때문에 큰소리가 났는지는 기억에 없다. 사실 기억난다 해도 별 것 아닐 터였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노상 그렇게 아웅다웅했으니까. 그러나 이 한마디는 분명히 기억난다.
“다신 오지 마라. 나도 이젠 네가 지겹다.”
혹시 나의 무의식이 그에게 닥칠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던가? 늘 나를 귀찮게 하고 만나고 나면 뒷맛이 씁쓸한 친구였지만 그렇게 심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임마!”
그러고도 녀석은 내게 이과두주 한 병을 쥐어주었다, 기념이라면서. 그리고 보름 뒤 아주 갔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녀석은 보호자로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녀석이 지명한 보호자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장례를 치루고 암자를 처분해 동창회에 기부했다. 오늘 49재 비용도 미리 선불했다. 녀석의 수중에 돈이 있어 암자를 산 게 아닐 터인데 소유권을 주장하는 어떤 여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녀석은 어쩌다가 돌층계에서 넘어진 것일까. 뒤통수의 울혈은 또 무엇일까? 혹시 여자관계로 원한을 사 누군가 계획적으로 불러내어 린치한 것은 아닐까. 나는 광후의 모든 여자들, 녀석의 죽음에 목소리를 바꾸던 여자들이 서운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여자들 중에 녀석을 죽음으로 몬 누군가가 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차라리 어떤 여자와 좋은 시간을 보낸 뒤 돌아오다 발을 헛디뎌 일으킨 뇌진탕이었으면 좋겠다. 녀석의 마지막이 입방아가 되는 건 싫다.  
어제부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바람이 차갑다. 꾸무레한 하늘은 낮이나 밤이나 우울하다. 오늘을 끝으로 한 바람둥이가 아주 갔다. 그 바람둥이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행복했고 많은 여자들이 불행했을 것이다. 그의 비명횡사에 행복했던 여자들도 불행했던 여자들도 몰래 눈시울을 적셨을 것이다. 너 그러다 죄 받아 임마. 신이 나서 떠벌리는 여성편력에 진저리를 치며 내가 자주 하던 말이다. 녀석에게 정말 죄가 있을까.  
“고인을 마지막으로 만나거나 통화한 게 언제입니까?”
“네?”  
“아, 아닙니다. 그냥 좀 궁금해서…….”
여자가 오래 잔을 들여다본다.
“하긴 그 녀석이 죄를 좀 졌어야지요.”
녀석 얘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었다.
“저 그 사람 알 만큼 알아요.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이었죠. 하지만 교활하진 않았어요. 때로는 얼마나 순수한지 함께 운 적도 많아요. 그 사람 때문에 저 많이 행복했어요.”
참으로 다행이다. 저 여자처럼 광후 때문에 행복한 여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이만하면 괜찮은 49재 아닐까.
“엄마 엄마 부르며 아이처럼 안겨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랬구나. 결국 그거였구나. 어쩐지 녀석은 술이 취하면 가끔 그랬다. 넌 좋겠다. 아직도 엄마가 있어서. 다 늙어 가지고 엄마타령은 미친놈. 그래 새끼야, 타령은 본래 없는 사람이 하는 거야 좆도 모르면서.
“그 술 남은 것 천천히 다 드시고 가세요. 광후가 죽기 전 기념으로 사준 선물입니다. 짜식 선견지명은 있어가지고…… 광후 말대로 기념이 되긴 되는군요.”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여자는 그대로 앉아 있다. 나는 혼자 남은 여자의 등을 일별하고 주막을 나선다. 화물차가 지나간다. 소리가 요란하다. 빈차였다. 나는 빈차 꽁무니를 물끄러미 오래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