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주이야기

나주 금안동 신숙주 생가 '한글마을' 조성 박차

by 호호^.^아줌마 2014. 8. 17.

나주 금안동 신숙주 생가 '한글마을' 조성 박차

 

 

나주 금안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전통마을 활용

주민 스스로 만들어 가는 ‘명품마을’ 역량강화사업도

 

조기초기 문신으로 한글창제의 주역이었던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선생의 생가를 중심으로 한 ‘금안한글마을’이 본격적으로 명품마을을 선언하고 나섰다.

 

나주 금안권역 단위종합정비사업의 핵심테마로 추진되고 있는 금안한글마을사업은 호남3대 명촌가운데 한 곳인 금안마을의 가치를 십분 발휘해 농촌체험형 여가활동의 메카로 활용한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특히, 녹색관광(Green Tourism)의 의미를 살려 도시와 농촌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한 역사문화유적의 보존 및 정비, 농촌지역문화의 창달, 주민 소득증대 등 농촌 지역사회를 활성화시키는 등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신숙주 생가를 중심으로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와 영평리 일대를 호남제일의 명품마을로 만든다는 금안권역 단위종합정비사업은 2011년도에 첫 삽을 뜬 뒤 지난해까지 1단계사업을 마치고 올해부터 내년까지 2단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사업비는 총 53억원. 지역의 경관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매력적인 농업·자연·역사·생활문화가 어울어지는 경관을 조성해 나가고 있다.

 

이를 위해 주민들이 스스로 명품마을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주민들은 이번 사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갖고 자체 워크숍 등을 통해 마을운영의 노하우를 익혀 나가고 있으며, 사업이 끝난 뒤 어떻게 마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스스로 머리를 맞대고 밑그림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

 

하지만 울산광역시 중구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를 중심으로 또 다른 ‘한글마을’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한글마을’ 명칭사용을 두고 논란이 일 것으로 우려되고 있는 상황.

 

중구는 최현배 선생 생가를 중심으로 둘레 2.3㎞, 면적 39만5천453㎡의 규모로 오는 2019년까지 한글마을을 조성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국비 공모사업에 뛰어든 상태다.

 

중구는 사업비 총 246억여원을 들여 △한글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마을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는 마을 △주민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마을 △체류하며 느낄 수 있는 마을 등 4개 세부사업으로 구체화 하고, 이미 한글이미지 가로등사업과 외솔도서관 건립사업 등을 발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한글마을’을 검색하면 울산시 중구가 바로 뜨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마을주민 정회만 씨는 “신숙주 선생은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한글마을의 원조는 선생의 생가인 나주 금안동이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금안권역 단위종합정비사업추진위원회 정병석 위원장은 “한국농어촌공사가 일괄위탁을 받아 추진하는 이 사업은 ‘역사와 미래가 함께하는 호남제일의 명촌 만들기 금안권역’을 타이틀로 삼고 있다”고 전하며 “내년까지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우리 마을이 ‘한글마을’이라는 브랜드로 나주를 알리는 새로운 관광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나주시와 지역민들의 성원이 필요하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이번 권역사업에 앞서 나주시는 2009년부터 선생의 생가인 노안면 금안리 277번지 일대의 1만여㎡에 생가(165㎡) 복원과 이와 관련된 편의시설, 조경 등 조성사업을 추진해 왔다.

 

한편, 1897년에 제작된 금성읍지의 <명기>항목에 의하면 “금안동은 고려조에 정가신이 한림학사로서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직위가 재상에 이르러 금안수곡으로 고국에 돌아와 동네를 출입함으로 마을이름을 금안동이라 하였다“는 유래를 전하고 있다.

 

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동네이름도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는 뜻으로 ‘금안동(禽安洞)’이라 불리었고, 고려말에는 음을 그대로 두고 뜻만 ‘금으로 만든 말안장을 가져온 동네’라는 의미로 ‘금안동(金鞍洞)’이라 불렀다”고.

 

이후 조선시대에는 1417년 신죽수 태생과 관련지어 ‘다섯형제의 탯자리’라는 뜻인 오룡동(五龍洞)이라는 지명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최전(崔典)선생의 제자 9명이 모두 과거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하여 구룡동(九龍洞)이라 했다는 별칭도 있다. 지금도 영안마을 양지뜸 윗골에는 구룡동골이라는 땅이름이 남아있다.

 

조선후기 금안동은 나주군 금안면 관할이었다. 금안동 열두 동네 땅이름은 1912년 일제 강점기부터이며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이 되면서 금안면은 이로면, 복룡면과 함께 이로의 老(노)자와 금안의 安(안)자를 따서 노안(老安)이 되었다.

 

 

 

 

 

신숙주 선생의 생가인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를 중심으로

‘금안한글마을’이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마을주민들의 명품마을 만들기를 위한 역량을 키워나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사진 맨 위↑ 금안한글마을 조성 밑그림

사진 두번째↑↑ 권역캐릭터 금안이와 금옥이

 

 

 

 

금안동 팔경

           전숙

 

고려 명신 정가신 명문장에 반한

원 세조 쿠빌라이 특별하사품

옥대에 금金 안장 두른 백마 타고

설제雪齋 금의환향하니

고향동네는 금안동金鞍洞이라 불리더라

정가신 신숙주 홍천경 문인재사 이어나는

명현들의 고향 금안동 팔경에 취해보리

 

제 일경은 오리임정五里林亭이라

오리나 뻗어있던 느티나무 숲길

지나가던 원님도 말에서 내려

숲쟁이라 이름 짓고

그윽한 나무 향에 쉬어가더라

 

제 이경은 천년석주千年石柱라

천년동안 매화꽃잎 날리며

하늘 바라듯 꼿꼿이 서서

금안동 지켜온 수문장이여

 

제 삼경은 산점행인山店行人이라

천년을 배향해온 설제서원

비자나무 옷깃을 여미는데

영안 마을 청산골 돌아 떠나는 나그네

청산유수 화폭 속에 한 점 그림이어라

 

제 사경은 보사귀승寶寺歸僧이라

광곡 웃뜸에 옛날옛적 배를 매두었다는

배뱅이 골짜기 넘어 바라에 세속 접은 스님

휘뚝휘뚝 천년고찰 다보사로 돌아가네

 

제 오경은 반월현암半月懸岩이라

무제봉 아래턱 큰 바위에 비스듬 걸린 반달

죽마고우 샛별 반가워

창공에 솟구치려다 까무룩 조는구나

 

제 육경은 쌍계명뢰雙溪鳴瀨라

누마루에 금안동 향약 알뜰히 품은 쌍계정

한국 팔대 명산 금성산 정기들

아흔 아홉 골 치마폭 타고 흘러오더니

삼현당* 두 줄기로 돌아나오며

여울 우는 소리 사무치네

 

제 칠경은 금성홍습錦城紅濕이라

금성산 서쪽 자락에 펼쳐진 저녁노을

민초들 타는 목마름에 붉은 감로주

서방정토에 넘쳐흐르듯 일렁이는가

 

제 팔경은 서석청람瑞石淸嵐이라

금안동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득한 서석 무등골엔

무릉도원 신선이 노니는 듯

아지랑이 남실남실 피어오르네

 

 

 

노안 금안동의 금안8경(金鞍八景)

 

제1경 오리임정(五里林亭)

오리길에 심어진 팽나무와 그 사이에 있는 누각과 정자의 모습

 

제2경 천년석주(千年石柱)

수백년 동안 마을어귀를 지켜 온 이정표(금안3구)

 

제3경 산점행인(山岾行人)

청산을 돌아 떠나는 나그네의 모습

 

제4경 보사귀승(寶寺歸僧)

배뱅이골을 지나 다보사로 가는 승려의 모습

 

제5경 반월현암(半月懸岩)

무제봉 아래턱에 걸친 반달 모양의 바위(금안1구) 또 다른 고문헌에는 오암목적, 거북바위 목동이 피리 부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제6경 쌍계정(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고려 충렬왕 때 한림학자인 설재 정가신 선생이 지었으며, 조선시대 대학자인 보한재 신숙주 선생과 말주, 죽오당 기건 반환 홍천경 등이 모여 국내 현사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조선시대의 대표적 정자

 

제7경 금성홍습(錦城紅濕)

금성산 자락의 저녁노을 모습

 

제8경 서석청람(瑞石淸嵐)

금안동에서 바라보는 무긍산의 피어어르는 아지랑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