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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김현임칼럼… 알베르 카뮈

by 호호^.^아줌마 2009. 12. 27.

 

김현임칼럼… 알베르 카뮈


작은 얼굴에 비해 훤하게 너른 이마, 예민한 눈동자는 그 어떤 부조리라도 단숨에 꿰뚫을 듯하다. 멋지게 담배를 꼬나 문 사진 속 프랑스인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되돌려 보는 어제다.

 

김장김치와 홍어, 돼지고기의 삼합에 군고구마가 준비된 회진리 반가의 두 번째 음악회는 한적했다. 사방에서 모이라 손짓하는 연말에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오지로 변해버리는 게 이곳 특유의 교통사정이니 그야말로 용감무쌍, 무리한 시도였다. 하여 몇, 몇 빈자리의 허전함에 그들의 술잔까지 대신해 마시고 싶었을까.

 

눈발 좀 성성하게 날렸다고 오후 여섯시가 못 미처 끊겨버린 버스다. 양 손 가득 음식거리를 사들고 동동 거리던 강추위 속 두 시간여, 그러니까 손님맞이 준비로 허둥거리던 전날의 부화가 덜 삭혀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최측 안주인이 먼저 취해버렸으니 다들 얼마나 열 적었을까. 게다가 하나 둘 일어서는 기색에 현관 앞 즐비한 화분을 차는 주정까지 보였다는데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잡히지 않는 이유가 어젯밤 기억처럼 아리송하다. 마른 잎 손질하다가 잘못해 생 이파리 하나 떨어뜨리는 실수에도 가슴 쓰린 반응을 보이던 내가 아니었던가.

 

부끄러운 어제일 따위는 이제 다 잊자. 한 해의 끄트머리에 하는 다짐인 듯 연신 고개를 흔들며, 한 면 가득 알베르 카뮈의 기사가 실린 신문의 스크랩을 위해 꼼꼼히 살펴 읽는다.

 

‘다시 아파온다’는 제호부터 ‘당신은 당신 속에 시대의 갈등을 요약하고 있었고 그 갈등을 몸소 살아가려는 열정을 통해 그 갈등을 초극하였습니다. 당신은 가장 복합적이고 가장 풍부한 하나의 페르소나였습니다.’라는, 돌연한 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한 회상기의 마지막까지 카뮈를 까뮈로 발음해 읽는 내게 화들짝 놀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제껏 나는 단 한 번도 알베르 카뮈라는 사나이를 제대로 부른 적 없었다는 자각이다. 하긴 이국 작가의 이름뿐이랴. 그동안 내가, 우리가 스치고 지나치는 숱한 편견과 오해들은 얼마나 많은가.

 

‘모든 친숙한 것들이 낯선 것으로 바뀌었다. 이 세계도, 타인도, 자기 자신마저도 자기로부터 떨어져 휑뎅그렁한 사물로 나타났다. 삶의 한가운데서 사막이 펼쳐졌다.’, 이 문구에 오래 서성이는 내게 문득 스치는 딸의 충고다. 딸은 말했다. ‘누가 엄마의 깊은 속내를 제대로 알겠냐’고. 글쎄, 어미보다 더 여문 딸은 덧붙였다.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억측은 무섭단다. 그러니 어렵겠지만 이제껏 잘 뗀 시치미의 자세를 고수하란다.

 

지상에서의 머문 짧은 날들 동안 자신의 열정, 자유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까뮈를 카뮈로 수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