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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살며 사랑하며… 맬겁시

by 호호^.^아줌마 2010. 1. 31.

 

살며 사랑하며… 맬겁시


김수평


흠 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전과 같지요. 사전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어도 재미가 빠진 것 같습니다. 사투리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사투리 : 어떠한 곳에서만 쓰이는 표준어 아닌 방언(方言). 일 점 일 획 틀림이 없는 말이지만 어째 좀 재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를 ‘고향의 언어’라고 바꿔 말하고 싶습니다.

 

고향. 태(胎)를 묻은 곳. 내가 이승의 옷을 벗은 후에도 어디로 가지 않고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키는 땅. 누구의 말처럼 우리 민족에게는 한 번은 꼭 찾아가야 할 곳. 바로 그곳 고향에는 조상의 숨결이 서리고 삶의 때가 묻은, 전설 같은 고향의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고향의 산이 보이고 강도 보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연(緣)의 끈으로 묶여 있는 얼굴들도 그려집니다. 닷째, 영국이, 연순이 누나, 악마 고모…. 까마귀라도 내 땅 까마귀라면 반갑다는 말처럼 고향의 언어를 들으면 반갑습니다. 경계의 벽을 허물고 가까워집니다. 반듯한 표준어가 아니고 투박한 사투리라도 그냥 알아듣습니다. 푸근합니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이런 전라도 사투리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 하얀 집’을 ‘깔끄막 우게 흐칸 집’이라 했고, ‘호수 위의 백조’를 ‘둠벙 우게 때까우’라고 했습니다. ‘호수 위의 백조’나 ‘둠벙 우게 때까우’가 같은 말이지만 그 맛이 사뭇 다릅니다. 표준어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사투리에는 녹아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 모 방송국 ‘남도부보상’을 가끔가끔 봅니다. ‘보부상’을 ‘부보상’이라고 한 것부터가 수상했습니다. 여자 진행자가 어찌나 숭악허게 이 지방 사투리를 구사하던지 절로웃음이 납니다. 만약에 저 프로를 경상도 사람들이 시청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웃습니다. 영화 ‘워낭소리’처럼 자막을 집어넣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사투리는 정으로 뭉뚱그려진 고향의 말입니다. 고향 사람들을 차지게 합니다.

 

언제부터라고 금을 그을 수는 없지만 애지중지하는 고향 말이 있습니다. ‘맬겁시’가 바로 그 말입니다. 맬겁시 ‘맬겁시’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좋아 한만큼 자주 씁니다. 쓰면서도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를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최명희의 <혼불>에서는 ‘매급시’라고 썼습니다. 같은 전라도지만 그쪽에서는 ‘매급시’이고 이쪽에서는 ‘맬겁시’라고 써도 되는 유연함이 사투리의 멋인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계산속 없이 투박한 ‘맬겁시’라는 말을 나는 사랑합니다.

 

편지를 합니다.

“어둠이 끕끕하게 나를 포박하고, 이뿌리 시리게 하는 호젓함이 야기(夜氣)처럼 가슴 오그라들게 하는 자정이 넘은 겨울밤. ‘맬겁시’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부탁할 것도, 약속할 일도, 계산할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맬겁시’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맬겁시’는 내 마음의 갈피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습니다. 이렇듯 속셈없이 살고자 하는 나는 그래서 허공인지도 모릅니다. ‘맬겁시’!” 지난 겨울 내가 쓴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전화를 합니다. 상대방은 거의 다 “무슨 일 있는가?” 하며 무겁게 받습니다. “아니, 얼굴 본지도 오래됐고 해서 ‘맬겁시’ 그냥 안부 전화했네.” 금방 상대의 음성이 나긋나긋하게 바뀝니다. ‘맬겁시’에는 사람 사이를 편한하게 해주는 무슨 묘약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친구끼리 전화 한 통 하는데도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 세상이 된 것 같아 야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궁금하고 보고 싶어 ‘맬겁시’ 주고받는 전화가 그리운 시대가 아닌지….

 

또한 인간관계도 사람보다 조건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돈, 사회적 지위, 잘 나가는 직업 같은 것으로 사람이 평가되는 세태에 마음이 아픕니다. 조건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그 조건이 사라지면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인데.

 

그래서 ‘맬겁시’라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빼기 보태기에 능한 세상에 삿대질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을 ‘맬겁시’ 사랑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그런 세상은 진정 오지 않는 것일까?

 

수런수런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올 봄에는 ‘맬겁시’ 보고 자운 그런 사람이 함께 오시면 좋겠습니다.

 

나옹 스님의 시를 빌렸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